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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은? /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18 조회수645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1-22)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ghty deeds done in your midst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long ago hav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고을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여전히 회개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 재산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인색할 때 이 말을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고도 배은망덕한 경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께 더욱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남을 돕는 일에 우리는 언제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을까요?

 

 

                       †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은?

마태오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 12제자를 따로 선발하신 후, 그들에게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담은 파견설교를 길게 하신 다음 실제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마르코와 루가는 12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비교적 간단한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내려받고 곧바로 나갔으며, 얼마 후 다시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마르 6,12.30; 루가 9,6.10) 마르코와 루가가 이렇게 똑같이 12제자의 파견과 활동보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일 것인데, 마태오가 이를 빠뜨렸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마태오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속해서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것으로 보도한다.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예수께서 진정 메시아인지를 물어보게 한 질문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진정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다.’는 사실을 한층 강조하기 위한 마태오의 편집으로 볼 수 있다.(마태 11,2-1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말씀을 어제 복음에서 떼 내어 오늘 복음과 연결해서 본다면, 예수께서 주시려는 ‘칼’은 분명 경고와 심판을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주변의 도시들, 즉 예수께서 지금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신 코라진(호수 북쪽 3Km), 베싸이다(호수 동편어촌), 가파르나움(호수 북편어촌)에 불행을 선언하신다.

이 불행선언은 곧 멸망의 경고요 심판이다. 이유는 당신께서 가장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곳인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기적들을 차라리 죄악의 온상지였던 시돈과 띠로(당시 페니키아, 현재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도시: 이사 23장; 예레 25,22; 에제 26-28장; 즈가 9,2-4; 요엘 4,4 참조)에 베풀었더라면 그들은 자루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며, 소돔에(창세 19장; 에제 16,48-50) 베풀었더라면 소돔이 유황불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넋두리를 하신다. 그리고는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들이 시돈, 띠로, 소돔의 도시들보다 훨씬 무거운 벌을 받을 것임을 예고하신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예언이다. 만약에 내가 직접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시고(19,1), 거기서 예리고를 거쳐(20,29) 예루살렘으로 상경할 때까지(21,1)는 줄곧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선교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유년시절을 포함한 30년이라는 공생활 준비기간을 나자렛과 이곳 도시들에서 보냈다. 즉 예수님의 고향과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도시들이 오늘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아야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떤 도시와 마을도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을 남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모르나 밤의 어둠이 죄악을 가리고 있으며, 그 속에는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쩌면 이미 뿌리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

“방배동아, 명동아, 남포동아 남천동아, 너희들이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웃기지 마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심판 날이 오면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불행선언을 맞았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이 띠로와 시돈보다 악한 죄악의 도시들이어서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직접 보았으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기적의 은혜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도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순간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믿음을 가진다면 오늘의 불행선언은 곧 행복선언이 될 것이다.

흔히들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그리 멀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고 자기식대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고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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