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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판단은 하느님의 몫 /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6 조회수712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오 7,3)

 

 Why do you notice the splinter in your brother's eye,
but do not perceive the wooden beam in your own eye?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것으로도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사형수들의 대부였던 김홍섭 판사는 자신의 판결이 항상 100점이라고 할 수 없으며 70점일 때도 있고 60점일 때도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잘못된 재판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 역시 빌라도의 오판으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시민 법정에서 잘못된 재판으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아무런 죄가 없는데 죄인이 된다고 합시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뜻에서 판단하지 않기를 당부하십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만 정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판단은 하느님의 몫 † 


마태오는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받지 않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과 되어 주는 되많큼 되어 받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 그리고 티와 들보의 상징어를 모두 어록에서 옮겨 썼습니다. "판단하지 말라"에서의 '판단'은 단죄를 뜻합니다. 이는 이웃을 단죄하면 하느님에게서 단죄를 받는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의 반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꼭 필요한 경우에는 잠정적으로 이웃을 판단하되 최종 판단만은 하느님께 맡기면 될까요? 대부분의 현대인이 이와같이 이웃의 잘못을 단죄합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인 힐렐은, "이웃의 상황에 있기 전에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오늘 산상설교의 테마는 판단과 교정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옳고 옳지 못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남의 잘못을 타일러 고쳐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을 판단하려 들지 말고,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빼내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굳이 남을 판단해야 한다면 자신도 판단 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남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려면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부터 먼저 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다보면 비판과 판단의 말도 섞여 나오기 마련이고,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것이 필히 자기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2절)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다른 사람의 전체적인 사람됨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한 행동을 두고 보더라도, 그 원인과 경과를 알지 못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만약 원인과 경과를 안다 하더라도 판단의 기준이 보편적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며, 자신만의 다양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그런 판단의 권한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실 판단이나 심판은 하느님의 일이요, 그분만의 몫입니다.


남의 잘못을 교정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을 교정하자면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눈에 온 지붕을 떠받치는 들보가 들어 있는데, 무슨 재주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라도 볼 수 있겠습니까?(5절) 이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것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남보다 자신을 더 큰 죄인으로 여겨야 하는 미덕을 말합니다.


즉 남의 죄는 티끌이요, 자신의 죄는 들보로 자각하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잘못을 교정하려면 할 수는 있으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용기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고 빼내주기 위해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먼저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용기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먼저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남을 판단하고 남의 허물을 탓하는 일에 나설 리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랍비는 그 사람을 창문가로 데려 가서는 창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고 대답하자, 랍비는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모습만 보인다고 대답하자, 랍비가 다시 묻습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창유리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에는 그대의 모습만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거울은, 거울의 유리 뒤에 칠한 수은 때문에 남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볼뿐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 뒤에 칠해진 이기심과 욕심과 아집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게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자기만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험담하고, 비방하며, 단죄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도록 요구하고 종용하며, 때로는 강요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네가 남을 단죄하는 일이 없다면 용서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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