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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7)/송봉모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6 조회수612 추천수7 반대(0) 신고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7) 

 

 

우리가 욥기를 보게 되면 36장까지 끊임없이 욥이 울부짖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런데 38장 부터 보시게 되면 하느님이 욥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퍼붓습니다. 쉬지 않고 퍼붓습니다.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살게 했느냐?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가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질문을 38장부터 계속 퍼부어 댑니다.

 

조금전까지는 욥이 퍼부어 댔는데, 고통에 대한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퍼부어 댔어요... 고통의 희생물이라는게 억울해서 퍼부어 댔는데 이제 하느님이 계속 질문을 퍼부어 댑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욥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질문은 결코 아닙니다. "네가 세상 물정을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보아라. 땅의 기초를 놓았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의 설계를 놓았느냐?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이것은 욥을 가르치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욥을 설득하려는 질문도 아닙니다.

 

 "너는 죽음의 문이 환히 드러나는 것과, 암흑의 나라 대문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본일이 있느냐? 녜가 넓은 땅위를 구석구석 살펴보았느냐? 빛의 전당으로 가는 길이 어디냐?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어디냐? 너는 빛을 제 나라로 이끌어 가고, 어둠을 본고장으로 몰아갈 수 있느냐? 네가 그 한 옛날에 태어나 오래오래 살았으므로, 그리고 네가 의롭게 살았으므로 그래 모르는 것이 없다면 대답해 보아라."

 

이 질문들은 욥을 아찔하게 만들고 무릎을 꿇게 만드는 질문들입니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터이니 알거든 대답하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아낼 작정이냐?"

 

도대체 이 질문들이 무슨 뜻인가? 수없이 퍼붓는 이 질문들, 네 팔이 나의 팔만큼 힘이 있다는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다는 말이냐? 건방진 ... 보이거든 그럼 뭉개어 보아라.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네가 좀 해 봐라. 하느님께서 욥을 향해 이렇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엇인가?

 

욥이 그전까지 던졌던 질문들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우스운 질문이며 의미없는 질문인가를 내기하는 겁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옹기가 옹기쟁이 보고 이런식으로 만들어 주시오. 저런식으로 만들어 주시오 질문을 했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이제 골프채 잡는 사람이 박세리 보고 "그런식으로 골프채 잡으면 안돼." 하면서 충고를 했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또 얘기하면 이제 볼을, 야구볼을 잡은 사람이 박찬호 보고 "그런식으로 폼을 하니까 또 지지... 아직도 5승을 못 거두었지..." 이렇게 얘기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이거 하나 뚜렷하게 얘기했습니다. 이거 외에 뭐 하나 뚜렷하게 대답해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게 걸어가시다가 한번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이 묻는 내용이 "선생님,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혹은 그의 부모이니까?"

 

 "저사람입니까?" 하는 것은 전통적인 고통관이고, "그의 부모입니까?" 하는 것은 바로 두번째 조상 탓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인한 두번째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세번째 고통관입니다.

 

저 사람이 태어날 때 부터 저렇게 장님으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개인처벌을 받아서도 아니요, 집단처벌을 받아서도 아니요, 신비로서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대답이 태어날 때 부터 단 한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이 장님한테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운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고통이 신비로서 주어졌을 때, 받아들이라고 하면 할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 부터 과연 깨달음이 없이, 깊은 이해가 없이 이것이 얼만큼...그리하여 끊임 없는 씨름이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받아들일만한 대답이 없느냐? 개인처벌, 집단처벌, 아니면 신비, 이런 것 말고 정말 이해할 수 있는 고통관이 없느냐?

 

그리하여 나오게 된 것이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단련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준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교육적인 고통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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