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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 3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5 조회수748 추천수9 반대(0) 신고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 3


   사소한 상처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앞으로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한 가지 환상이 따라다닌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존경받고, 인정받고, 귀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적 경향이라고 간주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남의 인정을 받는 것을 본성적으로 원하는 걸까? 아니다. 자기 마음에다 대고 가만히 물어보라. 그리고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남들의 존경인가?'' 그리고 어떠한 느낌이 오는가 점검해 보라. 만약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느낌이다. 곧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가 남들로부터 인정 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하신 것은 자유이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신 것은, 불교 언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무애진인(無碍眞人)이 되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진실된 인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마음, 자유로운 삶이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다는 환상을 지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사랑과 인정을 필사적으로 추구한다. 상처를 받아도 좋고 병에 걸려도 좋으니 남의 인정과 사랑, 관심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려서 가족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상기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느 이비인후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꼬마가 중이염을 치료받기 위해 엄마와 함께 병원에 왔다. 그 아이 는

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사 선생님, 애까 겨울방학 끝내면서 방학숙제를 쓴 일기를 제출했는데 거기에다 겨울방학동안 가장 즐거웠던 일은 중이염에 걸린 것이라고 썼다지 뭐예요." 이 말을 들은 의사가 아이에게 "왜 아픈 것이 가장 즐거웠지?"하고 묻자 그 아이는 ''제가 아프니까 온 가족이, 특히 엄마가 저를 위해주고 또 의사 선생님도 저에게 친절하게 해주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생각에는 겨울방학동안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스케이트도 타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 꼬마는 중이염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이 더 행복했던 것이다.


   위의 사례는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다른 이들의 인정과 관심 그리고 애정을 갈구하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받고 싶을 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의 병을 앓는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 서 있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애를 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린다고 해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 갈 뿐이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피곤하고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외롭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성이다가 상처만 받는 것이다.


   생에 대해서 염세주의적 시각을 가졌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를 도슴도치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한 쌍이 어찌나 추운지 서로의 몸을 붙여서라도 몸을 따스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가시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서로 떨어져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만 했다.


  우리의 인간관계도 그와 비슷한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쓸쓸하고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는 관계. 친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가 아는 사람을 타인에게 소개할 때 그 사람이 자기와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를 강조한다. 이렇게 친한 것을 가조하는 이들치고 상처를 입지 않은 이가 없다. 앞서 얘기했지만 친밀함은 곧 상처가 자라나는 온상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가까움과 친밀함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하여야 한다. 외롭다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한다는 것이요, 고독하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하기보다 홀로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고독이란 자신을 위한 공간,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왜 주님께서는 자주 외딴 곳으로 물러나 기도하셨는가?  왜 많은 교부들이 사막에서 구도의 삶을 살았는가? 왜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일년에 한 번은 한 주일 동안 대침묵 속에서 피정하는가? 이들이 고독을 이룹러 택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반성과 자기 성장의 시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은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홀로 있으면 있는 만큼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환상을 깨자고 말하였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정과 애정 자체를 아예 요구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인정해 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짝사람에 빠지는 것은 내 자유이지만 상대방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정과 사랑은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주면 받을 뿐이다. 우리는 왜 남이 주었다 말았다 하는 것들을 향해 애달아하는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며 사는 것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살아가는 자유인에게는 맞지 않는다.



                      - 상처와 용서중에서 / 예수회 송봉모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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