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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고통은 신비>(6)/송봉모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4 조회수709 추천수8 반대(0) 신고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6)

 

이러한 고통관이 풍미했던 것은 이들이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안에서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겁니다.

 

 "아니 잘못한 것은 우리 조상들인데 무엇때문에 우리가 바빌론까지 끌려와서, 이 바빌론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그러면서 그들안에서 퍼졌던 얘깁니다. 한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죄값이 3, 4대 후손에까지 이른다는 말, 이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3, 4대 까지 이르는데 그래서 우리들까지도 지금 유배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이 집단체벌사상, 단체기합사상이 팽배해지면서 어느 정도로 아주 냉소적인 말이 퍼졌는가 하면 이런 속담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은 신포도를 먹지도 않았는데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는 겁니다. 예레미아서(31, 29)과 에제키엘서(18, 2)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벌써 시큼해 진다는 겁니다. 아주 냉소적으로 자신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런 식의 기도를 또 드렸습니다.

 

 "내 아비, 내 조국, 내 어미, 내 조모, 내 식구, 내 친척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가 제발 나에게 오지 않고 비켜가게 해 주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당시 자기가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죄와 조상들의 죄로 해서 고통을 받기 때문에 이런 식의 기도를 드린겁니다. 이런 집단체벌, 단체기합식의 고통관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라면 이렇게 턱없이 조상의 무덤자리가 나쁘다고 우리를 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뭘 잘못했다고 나까지 벌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정말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아니나 다를까? 에제키엘 예언자가 등장했습니다. 소리쳐서 얼마나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를 외친겁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지요.

 

 "아비가 설 익은 포도를 따먹으면 아이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속담이 지금 너희들 안에 퍼지고 있는데 이제 내가 더 이상 그 따위 속담을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인간의 목숨은 다 나에게 달려 있다. 죄 지은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벌을 받을 까닭이 없다.

 

죽을 사람은 죽을 죄를 지은 장본인 뿐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대신해서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대신해서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을 것이요,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을 것이다. 자신의 행위는 자신이 질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18장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조상들의 죄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이 엉뚱한 후손이 벌을 받게 된다는 집단체벌, 단체기합 사상의 고통관은 없어졌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무덤자리 때문에, 조상들 때문에 여러분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에서는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섯개의 고통관 중에서 이 고통관은 더 이상 효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읽어 드린 에제키엘서를 보십시오. 한 사람이 바르게 살면 바르게 산 보수를 받을것이요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보수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전통적인 고통관으로 원위치 한 겁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행했느냐에 따라서 상도 받고 벌도 받는데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못된 행실을 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겁니다. 또 다시 원위치 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고통관으로 원위치한 겁니다.

 

죄와 그릇된 행위에 의해서 각 개인이 처벌을 받는다는 건 처벌사상, 바로 이 고통관으로 원위치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적인 고통관 앞에서 못 받아들였지요?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다가 그 뭐 좀 허물을 지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어서 내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어린 자식이 태어나서 무슨 죄를 지었다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 되면 사지불구가 돼서 있어야 되며, 도대체 내 착한 이 자녀가 왜 교통사고를 만나야 되며 아무 죄도 지지 않은 정말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대답을 못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그러니까 집단체벌 사상이 없어진 것은 좋은데, 구체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설명하냐? 이겁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을 못해주게 되니까 우리들 안에서 성경의 인물들 안에서 아주 냉소적인 태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제키엘과 거의 동시대를 살아갔던 예레미아가 냉소적으로 하느님께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신데 그래 올바르신 하느님께 법문제를 하나 제가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나쁜자들은 만사에 성공합니까? 어째서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은 잘 됩니까? 이것이 바로 에제키엘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예레미아의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집단체벌 고통관이 없어진 것은 좋지만, 대답이 없기 때문에 하바꾹 예언자, 조금 뒤의 인물입니다. 하바꾹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 당신께서는 눈이 밝으시어, 남을 못살게 구는 못된자들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으시면서 어째서 어째서 이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못 본체 하십니까? 나쁜자들이 착한 사람들을 때려잡고 있는데 어째서 잠자코 계십니까?"

 

이런 것들이 다 하느님께 대한 상당히 도전적인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들에 대해서 납득할만한 대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냉소적인 질문들을 성경의 인물들이 우리들 처럼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들이란 착한 사람들의 허물이나 있는가 들춰내고 나같은 의인의 죄나 찾아내는 것입니까? 당신은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면서 나오게 된 세 번째 고통관이 바로 욥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욥기는 상당히 뒤에 씌여진 것입니다. 예레미아나 하바꾹 이런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 대답없는 고통관에 대해서 욥기가 나중에 나옵니다.

 

그럼 도대체 욥기에서는 세번째 해결책으로서 어떤식으로 대답했는가? 그런데 참 답답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뭐 분명한 대답이 없습니다. 제가 한 두번 정도 병원에 입원해서 한주일 정도씩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선물받는게 욥기에 대한 책입니다. 그리고 또 신분님들도 오셔서 영적독서로 욥기를 읽으라고 수련장 신부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욥기를 암만 읽어봐도 대답을 찾기 못하겠습니다. 뭐가 좀 희한하고 명확한 대답을 주어야 되는데 그냥 아리송한 대답만 줍니다. "신비스럽다." "이름하여 고통의 신비다." 이겁니다. 미치는 짓이지요.

 

그렇게 울부짖는데 악인들은 저렇게 잘되고 그래 의인들은 무슨 죄가 또 없나? 하고 당신은 허물을 들춰서 벌이나 주는게, 기껏 대답해 주는게 "고통은 신비다." 이겁니다.

 

여러분들 힘들 때 욥기 읽지 마셔요. 읽어봤자 입니다. 그냥 고통은 신비라는 겁니다. 아무 대답없습니다. 솔직히 욥기에 "고통은 신비, 끝." 이것이 세번째 입니다. "고통, 신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지금 생의 풍파가 나에게 들이닥쳤다면 그리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이, 잘 걷고 있는 사람한테 콘크리트가 떨어져서 머리가 쪼개졌는데 그거 받아들입니까? "신비, 끝."

 

하지만 욥기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고통은 신비라는 아주 막연하게 대답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안에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한 진리는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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