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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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4 조회수764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Lk 1,63.64)

 

 

제1독서 이사야 49,1-6

 

제2독서 사도행전 13,22-26

 

복음 루카 1,57-66.80

 

어제는 오래된 수첩을 정리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새 수첩에 열심히 옮겨 적었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옮겨 적어지지 않는 번호들이 있더군요. 그래도 한 때는 얼굴을 마주 보며 진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만날 수가 없어서 옮겨 적을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전에 좋아하고 사랑했던 장소 역시 이제는 그곳에 갈 일이 없다는 생각에 그 이름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옮겨 적지 않는다고 그 사람과 장소에 대한 기억도 완전히 사라질까요? 아니지요. 비록 이름을 옮겨 적지는 않았어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 또는 어떤 물건이나 장소를 통해서도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수첩을 정리하면서 이제는 잊겠다고 이름을 옮겨 적지 않는 것처럼, 종종 주님을 잊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시는 분이라고, 나와는 관계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글로 옮겨 적지 않는다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주님에 대한 기억 역시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완전히 떠날 수 없으며,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장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평생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낳은 그의 부모 역시 주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었습니다. 바로 그 장면이 오늘 복음에 드러나지요.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선택합니다.

사실 즈카르야는 처음에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고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주님의 뜻을 지우려 했습니다. 그 결과 벙어리로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고 기억까지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절대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야 즈카르야가 입이 풀려서 주님을 찬미했던 것처럼, 보다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따스한 글(5-3=2)와 (2+2=4)('좋은글' 중에서)


 

(5-3=2)란 어떤 오해(5)라도 세 번(3)을 생각하면 이해(2)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2+2=4)란 이해(2)와 이해(2)가 모일 때 사랑(4)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오해할 떄가 있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오해는 대개 잘못된 선입견 편견 이해의 부족에서 생기고 결국 오해는 잘못도니 결과를 가져옵니다.

(5-3=2)라는 아무리 큰 오해라도 세 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풀이가 새삼 귀하게 여겨집니다.

사실 영어로 "이해"를 말하는 "understand"는 "밑에 서다"라는 뜻으로 그 사람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이해라는 것입니다.

이해와 이해가 모여 사랑이 된다는 말 너무 귀하지 않습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랑은 이해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이해와 이해가 모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낚시 바늘의 되 꼬부라진 부분을 "미늘"이라고 부릅니다. 한번 걸린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미늘" 때문이죠.

가까운 타인으로 살아가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늘을 감추고 살아가는 우리는 때때로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벽 앞에 모두가 타인이 되곤 합니다.

(5-3=2)와 (2+2=4)란 단순한 셈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서로와 서로를 가로막고 때로는 멀리 떨어뜨려 놓는 온갖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풀어버리고 우리 모두 "사랑"에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간에 오해라는 것이 참 어줍잖게 하찮은 일로 오해가 생깁니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상대방이 오해를 할 경우가 있고

또 무조건 선입견의 감정으로 오해를 만들기도 합니다. "오해"라는 엉킨 실타래가 생겼다면 "이해"와 "사랑"으로 서로 풀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Love Makes The World Go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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