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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꽃동네 19. 십자가를 보며 영적인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29 조회수359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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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말씀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만 육적인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 시기에, 많은 이들이 그런 눈으로 응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석 사제들과 그들의 유다인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인정해야 하는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덜 생각해서가 아니다는 뜻임을 앞서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지금 모든 눈은 감성적으로 집중되어 가는 시기입니다. 물론 감성적인 것들이 결코 나쁘다고 하는 것이나 혹은 틀렸다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감성적인 부분을 없앤다고 한다면,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함께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옆구리에 창에 찔려, 깊으신 <하느님의 자비의 피와 물>이 흘러 내리셨으니 우리도 또한 <회개하는 마음의 피와 정화의 눈물>을 예수님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가슴 깊이 창에 찔려 흘러 내리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감성을 죽여야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와 일치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금, 우리가 감성적인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라, 수석 사제들과 그들의 유다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육적인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에서 한 단계 넘어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보십시오. 지도자들과 그들의 경비병들과 유다인들은 육적으로 예수님께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똑같이 그것을 응시합니다.

그럼으로써 군사들이 가시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예수님의 뺨을 때리는 것에 우리도 똑같이 응시하면서 그들이 육적으로 예수님께 대하는 것들에 우리 또한 역시 육적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게 됩니다.그들의 눈이나 지금 우리의 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눈을 돌려 보십시오. 빌라도는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 부인의 말을 들었고 빌라도 역시 자기 마음을 유지하며 예수님과 심문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바로 육적인 것들에서 한 단계를 넘어서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수석 사제들과 그들의 유다인들이 벌이는 '죄목이 없는 횡포'에서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영적인 대화가 오고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영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우리 또한 영적인 눈으로 이 부분을 응시하고자 합니다.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으심에서 창에 찔려서 흘러내리는 <그리스도의 피와 물>에 더욱 일치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육적인 침묵의 십자가가 아닌 것입니다.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물었지만 결코 예수님에게서 아무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 (요한 17,17 참조) 이십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더라도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도 없이 침묵하는 십자가는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증언하시려고 여정의 끝에 이르러 '진리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십니다. 진리의 말씀에는 영과 생명이 있기(요한 6, 63 참조)때문입니다.진리의 성령과 진리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에 찔리신 <피와 물은 진리의 성령(피)과 진리의 생명(물)>이셨습니다.  

진리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영과 말씀의 생명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랑이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데 곧 사랑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이는 성령과 생명도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랑의 성령과 사랑의 생명>을 말합니다.공동체에 사랑의 성령과 사랑의 생명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의 공동체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아빠와 하늘이'의 십자가를 육적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군사 하나에게 창에 찔리시는 의미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육적으로만 응시하고 나쁜 쪽으로 군중들을 호도시키고자 합니다.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하는 소리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하늘이와 아빠의 사랑은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빠(삯꾼)는 풀어주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육적인 사람들은 결코 영적인 한 단계의 차원으로 넘어서지 못하고 심히 왜곡하며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 본질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사랑을 십자가에 매달기는 하더라도 이것만은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복되시어라하고 말할 때까지 버려진 이들에게 악과 죄와 고통과 죽음은 정화되지 않습니다. 왜곡함으로써, 버려진 이들은 한번 더 버려지고 평화와 생명을 그들에게 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는 자기 장애의 10가지나 되기에 참으로 삯꾼들에게는 짜증스러운 버려진 이들 가운데서도 소외된 이들을 대표합니다.아빠는 삯꾼들이 배려하기 조차 싫어하는 아기를 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10년간을 돌보다 이제 하늘이와 아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치되어 졌습니다.

악에 대항하고 고통에 대항하다 사랑은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지도자들과 삯꾼들과 창을 찌른 학대하는 군사 하나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이 반대의 표적이 된 그리스도의 피와 물에서 땅은 적셔지고 땅이 정화되어지기를 공동체는 영적인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횡포부리는 군중들을 호도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육적인 눈으로 보며 예수님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며 십자가에 매달리심과 죽으심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공동체가 정화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반대받는 표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복되시어라 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윤의 물질적인 계산이 앞서서 예수님의 사랑이 등한시되는 것은 사랑은 복되시어라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백하여야 하는 마음과 멀다 할 것입니다. < 게시글; 꽃동네 16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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