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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저녁묵상]강물 위의 나무토막처럼/ 정규한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1 조회수793 추천수5 반대(0) 신고

                      

                                 강물 위의 나무토막처럼

 

               

 

독수리는 겨울 철새로 약 70년의 수명을 자랑할 만틈 오래 사는 새 중의 하나로 알려

져 있습니다. 독수리가 이렇게 오래 사는 이유가 있음에 주목할 만 합니다. 독수리가

30~40대에 이르면 그 날카롭던 부리는 무뎌지고, 우아하던 날개는 거추장스러울 만

큼 깃털이 무거워 날기 힘들게 되고, 발톱은 달아빠져 날카로움을 잃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심각해져 "죽음의 길로 갈 것이냐?" 아니면 "아프고 고통스러

운 새 삶의 여정으로 쇄신할 것이냐"의 길목에서 고심에 찬 선택을 해야 합니다.

 

삶을 향한 쇄신을 결심한다면 그 독수리는 적어도 5-6개월 동안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감내해야 합니다. 먼저, 독수리는 높은 산 암벽 옆에 둥지를 틀고, 부리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부리로 암벽을 치는 아픔의 시간을 보냅니다. 부리가 다 깨어지면 새로 나는 부리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새로 난 부리로 자기 발톱을 하나씩 빼냅니다. 이 아픔의 시간을 겪고 나면 새로운 발톱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독수리는 울창한 숲 속으로 날아다니면서 자기 날개에서 깃털을 뽑아내는 고통의 시간을 보냅니다. 새로운 깃털이 날 때까지 쉬지 않고 날아다닙니다. 이처럼 독수리는 자신의 몸 전체를 새롭게 갈아낸 뒤에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삶에는 다 때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독수리와 같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선택을 해

야할 때가 있습니다. ''내 나이 이십 대''에 이러한 중대한 선택을 한 때가 있었습니

다. 대학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그 당시, 철거를 당한

어느 집안에서 어린이가 깔려 죽은 사건이 일어났고, 학교 게시판은 그 아이의 사진

과 함께 철거하는 당국을 비판하는 글로 가득 찼습니다. 물리학밖에 모르던 저는 "어

떻게 사회가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 사건은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

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을 위헤 무엇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만약 그들을 돕다가 내가 경찰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경찰에 끌려 가면 여러 가지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끌려가는 것이 무섭고,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성서를 읽으면서 확신으로 들어왔던 것은 "네가 끌려가더라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말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확신에 찬 내면의 목소리 안에서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생각 속에 성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이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

이었습니다. 우선,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끄셨는가?"를

살펴보는데 문득 대학교 2학년 때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병 때문에 휴학까지 해야 했기에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지냈지만, 새롭게 과거를 살

펴보면서 그 원망이 감사함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만약 내가 조선 시대에 살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잘 살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곧잘 했습니다. 그러면 만약 내가 그때 살아 장티푸스에 걸렸으면 죽었을 텐데, 현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감사 속에 "내 미래의 삶은 여분의 삶"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욱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직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는 하느님

께서 이렇게 이끄셨지만 지금 어떻게 하느님께서 이끄시는지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서는 결혼의 삶도 있는 것이고 수도자의 삶도 있는 것이기에

어디로 부르시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강물 위에 떠있는 나무토막처럼 나를 놓

아두면서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살펴보기로 한 것입니다.

 

기이한 것은 이러한 생각을 하기 전에는 친구들이 가끔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주었는데 이것을 생각한 다음에는 어떤 친구도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년 동안 결혼 생활과 수도자의 삶을 저울질하면서 나무토막이 흘러가는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도원을 바라보면 내 집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직 "내면의

깊은 확신"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확신이 필요했던 것은 "이

수도원이 내 집이라는 확신이 들면 예수회에 들어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군대를 제외하고는 삼사일 정도 여행을 한 것은 세 번 정도밖에 없던 나는 어디

를 여행을 하든지 항상 집이 그리워지고 집에 빨리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반년쯤 지난 어느날, 수도원을 보자 나도 모르게 "이 집이 내 집이구나" 하는 내면의 확신 속에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 그것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이 들었고 곧바로 "예수회에 입회해야 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떤 때는 인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

생활과 수도자의 삶"과 같은 다른 양식의 삶을 선택해야 할 때는 "독수리의 고통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것은 인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선택이 되

기도 합니다. 독수리도 이러한 선택을 합니다. 독수리는 ''고통''이 따른 삶을 선택하

고 그 선택에 따른 고통도 이겨내어 마침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독수리와 같은 선택은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에 따른 고통도 받아들이려는 "비운 마음(내가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인가 하시도록 놓아두는 것)"입니다. 이 비운 마음에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고통이 따른다해도 무엇이든 기꺼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이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해도 그 고통도 받아들이는 비운 마음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면 고통도 이겨내어 독수리와 같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회 정규한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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