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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 외의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13 조회수521 추천수2 반대(0) 신고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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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예수님께서 옷타비오 신부를 통해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주신 메시지 (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 1999년 가톨릭교회 인가 / 가톨릭출판사 )


나 외의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아들아, 네게 말했듯이, 너희가 기도할 때면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행위로 내게 이르기까지 올라와서 내 앞에 있을 필요가 있다. 마땅히 내 앞에 있되, 늘 물질적인 것을 청하려고 부심하는 이기심과 자기 자신을 내 앞에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앞에서 마음을 모아 흠숭하면서 내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시기를 기도하고, 나의 '나라'가 오고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한다.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나머지 모든 것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주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탈출기 2,3-4 참조 ; 신명기 5,6-7 참조- 역주)
이 첫째 계명은, 자유와 지성을 가진 조물(造物)인 인간이 지상 순례를 하는 동안 그 자신의 물질적 요구와 영적 요구 사이의 균형을 잡고자 한다면, 나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차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욕구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이 초월적 실재가 없다면 행복도 없고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럴 때 인간은 어찌나 큰 고통을 겪게 되는지,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지기 십상일 정도이다.


하느님께 돌아와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작품이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첫째 계명을 주시어 우주 질서의 조화 속에서 올바른 위치를 점하게 하셨다.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인간은 논리적이고 자연적인 범주를 두루 한 바퀴 돌고나면 하느님께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믿음과 이성의 논리가 이를 원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느냐고? 간단하다. 아들아, 하느님을 인간 존재의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으면 된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나중에 저 세상에서, 곧 천국에서 하느님을 누리기 위함이다." 이는 틀림없이 참된 교리이건만, 자연주의적인 인생관의 당연한 결과로서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일부 사제들에게서도 이 교리가 소멸되고 말았다.
그 실제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네가 사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너도 알고 있는 한 수도자가 있다. 자신을 봉헌한 영혼이니 의당 완덕을 지향하고 삶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이 교리도 알고 있어야 하건만, 네가 알다시피, 그는 고해성사를 주는 동안 간통을 포함해서 순결을 거스르는 온갖 죄에 대해서 참회를 요구하지도 않고 용서의 기도를 외우곤 한다.
그는 자신의 생활과 고해소에 몰려오는 허다한 신자들의 생활에서, 제6계와 제9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계명들을 지워 버린 것이다. 그런데, 단지 이 불행한 수도자만 홀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교들이 그들 교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해서이냐?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그런 사제들에게서 과감히 고해성사 집전권을 박탈하지 않느냐? 주교들이 그 여실한 타락의 중심점을 용납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그들의 이익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은 오늘날 마치 다스려야 할 세상이 있기나 한듯이 분주해서, 삶의 진정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사실 그들은 자신을 , 곧 그들의 "나"를 찾느라고 바쁘기 짝이 없다. 앞장서서 주도권을 발휘하는데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혀 있으므로, 외관상으로는 열성적이고 활동적인 사람들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주도권이지 나의 주도권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나를 앞장세우는 것이 훨씬 더 단순하고 안전하고 빛나는 길이다. 이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하느님을 찾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에 앞서 하느님을 만유위에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다는 것은
1) - 하느님의 '영광'
2) - 하느님의 '나라'
3) -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일하는 것
을 뜻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섬기지 않는 법이다.
아들아, 충실히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얼마나 되겠느냐?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한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곧 마귀를 섬기는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열매들이 배반과 배교와 부인 때문에 썩어 떨어지고 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들도 너희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리라....

아들아, 네게 말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정말이지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도 알다시피, 아무도 죽음을 모면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인간의 결정적인 종말도 아니다. 영혼과 육신이 잠시 갈라지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 하지만 예수님, 무신론자들은......,
- 말로는 무신론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훨씬 적다.
어떻든, 죽음 앞에서 의심하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건 그렇고, 나는 네게 이교도들도 알고 있었던 이 지혜가 없는 사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로마의 웅변가요 저술가였던) 치체로는 "죽음아, 네 판결은 얼마나 훌륭한가!" (Mors, quam bonum est judicium tumm.) 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교도들까지도 지혜로운 것으로 여겼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이 믿음이 없는 세대의 사람들은 마치 불길하고 음산한 물건을 치우듯 영혼에서 치워버린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아무도 죽음을 도착점이나 출발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의 수가 정녕 표현할 수 없도록 많은 것이다.

기도하고, 보상하여라! 걱정하지 말아라. 네 고통을 봉헌하여라. 네 고통은 나를 흐뭇하게 하니, 향기 그윽한 향처럼 내 옥좌에까지 피어오르고, 이윽고 은총의 비가 되어 다시 아래로 흘러내린다.
네게 강복한다, 아들아. 너와 함께, '생명의 말씀'인 내 말을 알리려고 네 곁에서 협력하면서 너를 사랑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강복한다.

(1976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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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형제 자매님은 죄인들의 회개와 고통받는 사람들과 사제와 수도자를 위해 미사와 기도때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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