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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예수님의 의노)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7 조회수3,156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의 의노"

+찬미 예수님!

어제 은총의 밤 끝나고

여기 주변에서

하루 주무신 분

편안하셨습니까?

사람의 습관 된 악습은

참 많이 있고,

우리들도 우리의 악습이

뭔지 다 압니다.

그것 고치려고 한평생 싸워도

안 고쳐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할 것 없이

보편적으로 있는 악습이 있어요.

뭘까요? 성질부리는 것.

분노하는 것. 화내는 것.

물론 드러나는 화도 있고

숨겨진 화가 있을 수도 있죠.

얼굴 표정서부터

소리 질러 가면서

저건 누가 봐도 화가 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데 속에서는

화가 있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옛날에 화병이라고 하고,

화병에 걸리면 오래 못 산다,

 몸 망가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화라는 것이

사람의 영도 죽이고

어떤 때는 육도 죽입니다.

예수님이 몇 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까?

옛날 공동번역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했는데,

요즘 성서는

일흔일곱 번이라고 나오죠.

몇 번이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무한히 용서하라 하신 뜻이지요?

이렇게 무한히

용서하라 하신 예수님이,

또 용서에 대한 비유를 여러 번

들어주셨던 예수님이

성경에 보면 화낸 적이 있습니다.

언제 화 내셨을까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 보고는

입 안에 담지 못할

얘기를 하셨어요.

‘독사의 족속들아.’

자기가 아끼는

베드로 사제한테는

 끔직한 욕을 하셨죠.

 ‘사탄아 물러가라.’

유대인들한테 제일 험한

욕이 마귀 새끼에요.

이보다 더한 욕은 없어요.

이렇게 예수님도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화를 내셨어요.

그분도 화내니까 같은 배를

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죠?

그런데 여러분들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는 화는 의노

(의로운 화)라 하고,

우리가 내는 화를

분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아무 때나

짜증내신 것이 아니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에

방해되는 사람, 조직, 사상 등

앞에서 가차 없이

의노를 보이셨어요.

하느님 나라를 무시하고 사람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경우에는

의노를 보이셨다는 거죠.

우리들의 분노와 예수님의

의노는 다릅니다.

우리 교회의 어른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 보면

온유하고 생전

화 안내실 것 같잖아요?

그런 분이 아르헨티나에서

 대주교 할 때부터도 깡패,

마피아랑 싸우십니다.

또, 교황님이 되시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마피아한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마피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죠?

일본엔 야쿠자,

이태리에는 마피아가 있지요.

그 마피아가 돈세탁을

바티칸 은행에서 했고,

또 그중에는 매수된

신부도 있었어요.

하지만 해코지 당할 까봐

그걸 알면서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교황님은 그것에 연관된 부패한

신부들을 다 해임하고 책임자였던

주교의 옷을 벗겨버렸죠.

더 놀라운 것은 마피아

본거지에 가서 대낮에

미사를 드리면서

마피아한테 경고하십니다.

‘거룩한 것은 조금이라도

속되게 만들지 마라.’

착해 보이는 그 교황님이

하느님 나라 건설을 방해하는

어둠 앞에서는

단호함을 보이셨죠.

그 모습을 보면 참으로 목자다,

정말 예수님 닮은 목자다.

우리들이 보통 내는

화를 분노라고 하고,

이 분노는 지극히

이기적인 화입니다.

뭔가 손해 볼 것 같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때.

참으면 덕이고 하늘에

공로를 쌓을 것인데,

그 순간을 못 참고 입으로든

눈으로든 주먹으로든 카톡으로든

어떻게 라도 표시를 해야 돼요.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처럼 의노를 보여야 될

순간엔 항상 꼬리를 내리고 피하죠.

옆집에서 ‘도둑이야.’라고

소리 지르면 몽둥이

 들고 밖에 나가세요?

내 집 문부터 확인하죠?

‘불이야.’ 해야만 자기 집에

불붙을까봐 양동이

하나씩 들고 나온답니다.

요즘에는 서울 시내 다니다가

길에서 얻어맞는

사람이 그렇게 많대요.

며칠 전 뉴스를 보니 버스에서

숨소리가 너무 크다고 10대가

할머니를 두들겨 패 죽였어요.

할머니가 천식이 있어나 봐요.

그 버스 안 어느 누구도

말린 사람이 없었데요.

진짜 의노를 보여야 될 때는

나 다칠까봐, 내 시간 뺏길까봐,

나한테 불이익이 돌아올까 봐,

보복이 돌아올까 봐

관여 안 하잖아요?

솔직히 안 그래요?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되죠.

화내는 것조차도 예수님이

언제 화를 내셨는지 잘 묵상해서

때 아닌 경우에는 참아야 돼요.

하늘에 공로를 쌓아야 돼요.

우리의 멘토(mentor)세요.

자, 그러면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누구였을까?

혹시 예수님이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의노를 보이지 않으실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그 의노로부터 자유로워질

자신이 있으십니까?

뒤돌아보면 예수님이 분노하셨던

그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의노도 보이시겠지만 회개하면

아마 품에 안아주실 것에요.

독사의 족속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

사탄아 물러가라.

내 아버지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지 말거라.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크게 네 종류에요.

첫 번째, 위선자들 앞에서

의노를 보였어요.

위선자의 사전적인 의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에요.

말로 사람들에게 엄청난 짐을

지어주면서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요.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이방인들 앞에서

행실을 단정히 하여라.’

성서적으로 이방인은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방인이에요.

자매님들, 남편과 자녀가

세례 받지 않고 있다면

다 이방인입니다.

그 앞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입만 열면 사랑 찾고 성당에서는

인기 좋지만 막상 피붙이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못 돼 처먹었어요.

그 꼴에 직책을 맡아서

성당에서 뭘 한 대요.’

‘우리 동네에 제일 입 싼

여자가 누군지 아세요?

성당 다니는 아무개래요.’

‘우리 동네에서 돈 제일

잘 떼먹는 여자가 누군지 아세요?

성당 다니는 아무개래요.’

그 사람을 보고 이방인들이

하느님 앞으로 나가겠습니까?

여러분들 스캔들(scandal)이라는

말은 남녀 관계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에요.

라틴어로 스캔달룸(scandalum)

이라는 말뜻은

‘걸려 넘어지게 하다.’입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님 모습에

걸려 넘어져서 성당에 못 가요.

시누이가 올캐하는 모습을

보고 냉담에 빠져있어요.

위선자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끔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인간을 뜻합니다.

혹시 하느님 앞에 나가려는

사람들이 나의 행실을 보고

등을 돌리게

 만든 적은 없었던가?

현재에도 그렇게 살고 있다면

예수님의 그 엄한 의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물론 종이 반 접어 코가

딱 맞듯 살 수는 없지만,

자기가 한 말은 지키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 의노의

대상은 가까운 사람들과

주변 사람에게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관심은 다른 말로

무책임하다는 말과

동의어에요.

무관심의 죄가 얼마나

 큰 지는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 하셨지 않았습니까?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나자로를 부잣집

문 앞에 데려다 놓아요.

부자는 나자로를 먹였어요.

뭘 먹였는지 아시죠?

유대인 부자들은 고기를

먹고 나면 식빵으로

손의 기름기를 닦았습니다.

버리면 개들이 주워 먹는

그 식빵조각을 모아다가

 대문 앞에 있는 나자로를

먹여 살렸어요.

그런데도 부자는

자신만만했죠.

‘제는 내 덕에 먹고 살아.

나는 축복받을 자격이 있어.’

그런데 둘이 다 같이 죽고

나자로는 아브라함 아버지

품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에 갔지요.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뭡니까?

나자로에게 악행 행한 적은 없고,

지나다니며 발로 찬적도 없고,

몽둥이로 팬 적도 없어요.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악행을 행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못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무관심했기 때문에,

다른 말로 최소한의 책임을

못 졌기 때문에 그래요.

‘남한테 해 끼치지

않아도 천국 간다,’

이런 말 성경에 없어요.

적극적인 선을 행해야 합니다.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나 혼자 열심히 살면 돼.

네가 죽든 말든 네가 해결할거고,’

이런 것이 무관심입니다.

내 혈육들 무책임하게 내버려두고

입으로만 아픈 척하면서,

성당에서 봉사를 하면 뭐 합니까?

내 피붙이 물질이 필요할 땐

내 거라도 쪼개서 줘야 합니다.

우선 살려야 합니다.

무관심, 무책임하게 사는 자는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분명히 될 겁니다.

세 번째 예수님 의노의 대상은

하느님 법보다 자기가 만든 법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내용을 담든

그릇이기 때문에 꼭 필요해요.

법이 없으면 마치 그릇에

담기지 않은 물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같아요.

틀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있어야 세상이 유지가 돼요.

그러나 그 법이,

자기가 만든 법이

하느님보다 사람보다

더 정확하다 여기는데

비극이 있습니다.

맞지도 않는 눈금의 잣대로

하느님을 재고 식구들을 재고

본당신부를 재고 주교를 잽니다.

자기 안에 자기가 만든 법이

많은 사람일수록

 피곤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학자들이

수천 가지의 법을 만들어 놓고

꼼짝달싹 못하고 살았지 않습니까?

어린이 같은 자가 천국에

간다는 말뜻은 그 뜻입니다.

자기가 다 컸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자기가 만든 법에

거미줄처럼 걸려서

영적자유를 못 누려요.

자기 법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죠.

첫 번째, 늘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잘해요.

왜? 자기가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기에.

‘우리 성당에 나만큼

똑똑한 사람 없어.

내가 우리 성당의 기준이야.’

두 번째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은 마음속에 분노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인성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법을 만들어서

방어를 해요.

세 번째로 이런 사람들은

열등감이 강해요.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신하다고 생각하고

오버액션을 하지요.

그리고 네 번째로

이런 사람의 특징은

배려가 없어요.

아주 이기주의에요.

그리고 늘 판단하기 때문에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으면서 매사를

부정적으로 봐요.

한 번도 밝게 본 적이 없고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또한 칭찬에 인색해요.

여러분들 한 해 살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을

몇 번 했는지

 한 번 헤아려보세요.

통계가 나왔는데, 일 년 동안

살면서 다른 사람 칭찬한 게

 열 번이 안 된데요.

우리의 눈금도 맞지 않는 잣대는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고,

사랑과 용서라고 하는 분별의

잣대를 가지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취하는 인간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생각해 봅시다.

성전 안에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이 있어요.

성전세를 내야 되는데,

바깥의 돈은 안 받습니다.

그런데 입장료 100원 짜리를

사려면 만 원을 내야했어요.

나머지는 대제사장이

떼먹는 거죠.

그 밑에 대사제가 직접

운영하는 환전상들이 있고,

짐승 파는 장사치들이 있었겠죠?

순례객은 1년 동안 열심히

기른 비둘기, 양을 제사 때 쓰려고

그 먼 시골에서 끌고 옵니다.

하지만 그걸 검색하는 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핑계를 대서

퇴자를 놓고 성전에서

사라고 합니다.

성전 밖과 안이 많게는

50배까지 차이가 났어요.

성전 안이 서슬이 퍼런

상황이니 아무도 불만을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환전상과 장사꾼들을

다 뒤엎으시고 채찍을

만들어서 내쫓으십니다.

‘내 아버지 집을 도둑놈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

대사제가 위에서 보며

예수님을 더 이상 살려두면

안 되겠다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은 이 사건 때문에

명을 단축하신 것에요.

 순진하고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신앙심을 빙자해 돈벌이 하는 것을

예수님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 앞에서 예수님은

목숨 걸고 의노를 보이셨습니다.

 정리합시다.

주님의 분노를 의노라 부르고

우리의 화를 분노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의 분노는 자기중심입니다.

손해 볼 때, 자존심 상할 때.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방해되는 조직이나 사상,

인간들 앞에서 의노를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되었던 네 종류의 인간들은

첫 번째는 위선자들,

두 번째는 무관심하게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들,

세 번째는 자기가 만든 법이

하느님 법보다 윗자리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네 번째는

착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네 종류의 인간들.

나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안 되게끔 어떻게 살아야 될지

각자 생각해봅시다.

2018년 사순 제3주일 (3/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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