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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 분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 최시영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05 조회수635 추천수8 반대(0) 신고

6월 예수 성심성월을 지내면서 그 이름 때문에라도 예수님 당신 마음을 조금은 더 가까이에서 엿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이 시기의 미사 복음을 만나면서 거듭 다가왔던 주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는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주 깊게 깨달았고 이것에 의해서 감동되신 분이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 분이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당신도 우리를 아버지처럼 그렇게 깊게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달에 보았던 예수님 모습 가운데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는 복음구절들이 있다. 그 중 마르꼬 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때에 있었던 일로서, 포도원 농부들에 관한 우화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이다.(cf. 마르 12, 1-12; 마르 12, 41-44).

  포도원 농부들에 관한 이야기는 당신 아버지는 진정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주 깊게 깨닫고 그것에 감동된 분이 아니라면 들려주실 수 없는 것을 우화 형식을 빌어서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마치 일꾼처럼 땀 흘려 포도원을 가꾸었다. 그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즙 짜는 확도 파고 망대도 세웠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땀이 베인 그 포도원을 아주 관대한 마음으로 농부들에게 도지로 내어 주고 먼 고장으로 떠나 있었다. 그들이 어떤 인품의 사람인지, 적절한 때에 소출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인지 등을 굳이 따지지 않았다. 포도수확 철이 되자 그는 하인을 보내어 그 농부들로부터 포도원의 소출을 받아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하인을 붙잡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후려치며 모욕하였다.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다른 종들을 여럿 더 보냈지만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이제 그 주인에게는 더 이상 보낼 하인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사람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이 남았다. 주인은 이제 그 하나 남은 외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바람을 표현한다.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cf. 마르 12, 1-12)

  도대체 그 주인은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주인에게 이 농부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을 타인으로서 그리고 단순히 소출을 바쳐서 자신의 창고를 채워 주어야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당신 기대와 희망과 애정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끊임없는 신뢰와 희망과 애정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들이 너무 소중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밖에 없는 당신 아들처럼 보신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을 권위적이고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함부로 막 대하여도 무방한 사람처럼 보았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여도 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포도원 주인의 모습과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다시 한 번 더 확인되는 것이 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렇게 무섭구나.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이렇게 왜곡되게 보게 하는구나.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려는 분을 오히려 걸림돌로 보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구나.’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을 아주 잘 알고 계셨다. 당신 것을 모두 내려 놓으셨으며, 이기적인 욕심이 없으신 분이셨기에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실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도 당신 마음을 아주 잘 엿보게 하신다. 그날 성전에서 헌금함에 동전을 넣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영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가진 것 가운데 얼마를 봉헌 하는 것만 하여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 날 성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를, 곧 그의 생활비를 몽땅 던져 넣은 그 가난한 여인만이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여인은 자신을 위해서 무엇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cf. 마르 12, 41-44)  하느님과 이웃을 믿지 못하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여인의 이러한 신뢰와 비움의 삶은 그대로 예수님을 감동시키고 움직였다.
  이 여인의 모습을 본 후 예수님은 그 감동과 함께 굳이 당신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셨다. 왜 그들을 가까이 부르셨을까?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자기 비움의 삶을 살아가는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리라. 그리고 하나 더 제자들에게 당신 속마음을 엿보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도 그 여인의 모습을 보며 감동되어서 그 여인과 같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이 감동되었을 때에 바로 당신 제자들, 즉 우리를 떠올리셨다. 그 감동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성월을 보내며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리며 문득 이런 모습의 하느님이 떠오른다. 하느님 당신께서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에 들지, 어떻게 하면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는 모습이다. 이제 우리 차례이다. 예수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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