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 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5-22 조회수689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년 5월 22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16,11-15

 

복음 요한 15,26─16,4ㄱ

 

 

이 새벽 묵상 글의 날짜를 적으면서 문득 ‘나도 참 독하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저는 스스로를 끈기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서 일찍 포기할 때도 많았지요. 그런데 이 새벽 묵상 글을 벌써 6년째 계속 쓰고 있으니 얼마나 제 자신이 독합니까? 하긴 담배 끊는 사람은 독한 사람이라고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담배도 벌써 5년째 피우고 있지 않으니 제가 독한 사람이 맞기는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살아오면서 스스로도 잘 몰랐던 제 자신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깜짝 깜짝 놀라게 됩니다.

아마 이런 저의 체험은 여러분들 각자 각자에게도 똑같이 해당될 것입니다. 스스로 잘 몰랐던 자신의 성격, 또 자신의 능력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그러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뭐 그럴 수도 있지.’하면서 덤덤하게 받아들이나요? 아닐 것입니다. ‘아니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네.’하면서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내 몸도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더 모를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을 왜 이렇게 잘 아는 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각종 판단과 단죄가 난무하는 곳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들이 많이 쓰는 인터넷이라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익명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더 많은 판단과 단죄를 발견하게 되지요.

물론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단죄는 이 현재에만 있는 새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먼 과거에도, 어쩌면 이 세상의 창조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남에 대한 판단과 단죄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모습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뜻대로 행동하고 말하지 않는다고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실제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요.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이미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함으로써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과 단죄의 습관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지요. 바로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즉, 남에 대한 판단과 단죄라는 죄로 기울어지려고 할 때, 진리의 영인 성령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로 성령을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그런 죄로부터 멀어졌을까요? 어쩌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서 더 많은 판단과 단죄를 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 죄에 더욱 더 깊이 물들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다시 가져가셨을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성령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의 영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진리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나’라는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성령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끊임없이 남을 판단했었던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사이왕의 덕치('좋은 글' 중에서)


 

마케도니아의 왕 세계 정복자 알렉산더는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나라를 침공하여 도시와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백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였다.

마침내 서쪽 끝 도시에 도달하였는데 그곳 백성들은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풍족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알렉산더왕은 이 평화로운 도시의 왕인 사이왕이 덕스럽고 지혜로운 판결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알렉산더와 사이왕이 덕치에 관하여 대화를 하고 있던 중 두 사람이 찾아 왔는데 알렉산더왕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줄다리기 대화를 지켜봐야 했다.

땅을 매매한 두 사람이 찾아 왔는데 땅을 산 사람이 이 땅을 개간 하다가 보물 상자 하나가 나왔다. 땅을 산 주인은 땅을 샀지 보물을 산 것이 아니므로 전 주인에게 돌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전 주인은 나도 보물이 있는 줄 모르고 사용하여 오다가 팔았으니 그 보물 상자는 당신 것이요.

이와 같이 서로 가지라고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는데, 왕이 판결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 사이왕은 한참 고심을 하다가 땅을 매매한 자들에게 자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땅을 산 이는 아들이 있었고, 땅을 판 이는 딸이 있다고 하였다. 사이왕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 두 자녀를 혼인을 시켜 그 신혼 가정에 보물 상자를 주도록 명령하였다.

정복자 알렉산더는 그 모습을 지켜본 후 우리나라 같으면 다르게 판단을 하였을 것이오.

사이왕은 의아해 하면서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다. "일단 두 사람은 감옥에 보냅니다. 그리고 보물 상자는 왕인 나에게 바치지요."


return to love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