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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귀 막은 헤로데 마냥 불안에 떨지 말고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27 조회수1,536 추천수0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이는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참조)’ 우리도 이렇게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지은 죄 때문일 게다. 진리와 정의를 저버렸을 때 오는, 양심의 소리가 불안이리라. 그는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충고를 무시하고 불의를 저질렀다. 따라서 아무리 권력자라도 지은 불안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디언들의 벽화나 상형 문자는 아이 마음은 세모, 어른 마음은 동그라미로 표현한단다. 죄 지으면 마음이 아픈 건, 죄 지을 때마다 세모꼴 양심이 회전하면서 뾰족한 모서리가 마음을 긁기 때문이라나. 허나 한두 번 범하면서 모서리는 점점 닳아 동그랗게 변한다. 결국 어른이 되면 죄도 별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나. 인간은 누구나 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죄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지은 죄를 되돌아보며 뉘우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 데 있다. 성찰과 정화의 시간이 없이 거듭되는 죄는 양심을 무디게 한다. 문제는 지도자가 마지막 보루인 그 양심마저 내몰라하면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에서 좌표 잃은 배처럼 모두가 제 모습을 잃고 표류할 게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리라.

 

헤로데는 탐욕과 피비린내의 권력에 젖었기에,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그는 예수님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의 출현이라는 소문에 집착했다. 한때 그를 의인이라고 여겼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온 마음속에 감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두고 종말에 다시 오리라고 믿는 엘리야라고 생각하고, 또는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만, 헤로데는 유독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말에 쾌나 신경이다. 그만큼 그는 헤로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가 바른말만 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를 죽일 때에도 몹시 괴로웠지만 마지못해 목을 베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가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그런 그가 예수님에게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실로 예수님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었다. 오히려 자유로웠던 것은 예수님이었다. 어쩌면 헤로데가 호기심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는지도.

 

우리도 문득 이전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마주할 때가 있다. 가끔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는 지도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되레 안타깝다. 믿는 이는 이런 양심에 반하는 일에 분노해야 할 게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에 언제나 함께 하기에 지도자가 바른 길 가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운명을 주관하시는 그분도 언제든 함께 해 주실 거니까. 헤로데처럼 진리에 귀 막지를 말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구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헤로데,요한,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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