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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만 /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08 조회수1,932 추천수0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서구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다른 이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단다. 최근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한 이를 돌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핑계로, 보편적 도덕심을 잃는 위기의 한국 사회를 볼 때에, 나의 이웃에 대한 정의는 자못 중대하다고 생각이 든다.

 

이웃은 가까이에 있는 이라는 뜻이다. 이 가까움은 단순한 거리상의 문제를 넘어 혈연, 그리고 친분이 있는 이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이방인, 사마리아인 등 나와 관계없는 이는 나의 이웃일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러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꾼다. 율법 교사가 적대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이지만, 그가 보여 준 행동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담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논쟁을 시작한다. 이는 대개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613개의 율법 조항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 등 이른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쏟는 것들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사마리아인들은 어쩜 가장 혐오스러운 민족이었다. 그들은 사마리아 함락 뒤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유다인 대신 사마리아로 끌려왔다. 그들은 모세를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신전을 지어 그들의 신을 믿었다. 따라서 유다인들 눈에는 그들은 배교자로 그들을 너무나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마리아인은 처음 보는 이지만 위기에 빠진 이웃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시간을 내어 주며, 자상하게 돌본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당신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를 드러내 줄게다.


사랑은 합리적 이유나 제한을 거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에서 진가를 발휘하기에. 나는 얼마나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것인지 되돌아볼 때다. 예수님은 유다의 철전지 원수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실천을 이웃의 본보기로 비유하였다. 그는 마음과 생각과 목숨을 다하여 초주검으로 버려진 이를 내 몸같이 보살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이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우리 이웃은 과연 누구일까? 정녕 나를 필요로 하는 이가 되어주어야 할 게다. 따라서 지금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까?’를 깊이 생각하자.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하는 이가 아닌, 진정 나를 필요로 하는 이를 찾아 나서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사마리아인,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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