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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4.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04 조회수1,927 추천수0 반대(0) 신고

 

 

마르 12, 28-34(연중 31주 주일)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1독서>에서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다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강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 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 37-39).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계명은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 28)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첫째가는 계명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밝히신 하느님의 존재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행동의 원리로서의 사랑의 계명에 앞서, 먼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이신 분과 그분의 것, 그의 소유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사랑의 계명이 흘러나옴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 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사랑의 계명<신약>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 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 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 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 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 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 34; 15, 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신명기>하느님 사랑(6, 4-5)<레위기>이웃 사랑(19, 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며,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형제가 곧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느님이요, 상인에게는 손님이 하느님이요, 본당신부에게는 본당신자들이 하느님이요,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요, 나에게는 공동체 식구들이 하느님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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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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