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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회 희망의 아이콘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57주년 추모(7)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07 조회수2,076 추천수0 반대(0) 신고

조선의 세 신학생들은 부모님과 같이 보살펴 주는 스승 신부들의 슬하에서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장차 짊어질 책임의 중대함과 사명감에 입각하여 열과 정성을 다하여 공부했기 때문에 학문의 진도가 빨랐다.


그런데 이렇게 순탄하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변수가 발생하였으니 그해 8월에 마카오에서 청국인들에 대한 민란이 일어나 그들은 외방 전교회원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 이후 민란이 진정되고 그해 겨울 다시 마닐라로 귀환하였으나 이듬해에 함께 공부하던 최방제가 열병으로 인하여 병사하는 불행을 맞이하였다.


함께 형설에 공을 쌓아 조선에 돌아가서 민족의 길잡이가 되기로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최방제를 잃은 최양업과 김대건의 아픈 심정은 이루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도와 낙담에만 빠져 있을 상황잉 되지 않았으니 1839년 4월 마카오에 민란이 다시 발생하면서 다시 마닐라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마닐라서 30리 거리에 위치한 론롬베이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에 머물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그해 11월에 다시 마카오로 귀환한 이후 라틴어의 기초 실력이 이루어져 베르뇌 신부와 매스트르 신부를 교수 신부로 맞이하여 철학 공부에 정진하여 1841년 가을에는 철학 과정을 수료하였고, 신학 과정으로 진급하였다.


이제 그 두 신학생들이 조선을 떠난지 어느 덧 6년이 되었으며 나이도 21세가 되었으니 이제 소년기는 지나고 청년기로 접어드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한편 그동안의 열성적 연학의 결과로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스콜라 철학도 이해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신부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더불어 마카오에 거주하는 청국인과 포르투갈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중국어를 습득할 수 있었으며, 충분치는 못하나 포르투갈어에도 약간의 소양을 가질 수 있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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