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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적인 수단으로 해결하려 / 신원식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5-08 조회수732 추천수7 반대(0) 신고

 5월 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요한10, 1-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10절)

 

지난해에 가톨릭 출판사에서 있었던 관상 피정 미사에서 예수회의 신원식 신부님께서 해 주신 강론 말씀입니다.

 

어제 잠깐 TV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물을 보았습니다. 동물들이 어떻게 잡아 먹고 잡아 먹히는가를 시청하면서 정말 대단히 잔혹함을 보았습니다. 다큐멘터리 끝부분에서 나래이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동물들의 생존 경쟁은 정말 치열한데 지금 살아 있는 동물들은 수 백만 번의 공격을 이겨냈을 터이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입니다. 

 

도대체 양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양은 모든 동물들중에 가장 공격성이 적고 방어력이 떨어지는 동물들입니다. 다른 동물들이 대항하면 속수무책입니다. 염소는 뿔로 한 번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양들의 뿔은 안으로 둥글게 말려 있어서 공격할 수도 없지만 받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달리기를 잘 한다든지 색깔을 변하게 하여 숨기라도 할 수 있는데 양은 초록의 초원에 흰색이라 금방 눈에 띄입니다. 도대체 이런 양들이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수 백만년에 걸쳐 없어지지 않고 종을 유지시켜온 것이 기적같이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다 못해 번식력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거북이는 방어력이 없지만 알을 많이 낳아, 알이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90%가 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지만 종을 유지 시킬 수 있습니다. 양은 누가 해꼬지를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호주에 있을 때 신자중에 양을 키우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양을 5천마리 정도씩 키웠는데, 그곳은 6,7,8월이 겨울이고 5월이 가을이어서 그 때 양들이 털을 깍이게 됩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털이 많이 나고 털이 가장 좋으니까 양들의 털이 싹 깍이는 것을 보고 지금도 모직으로 된 옷은 입기가 거북합니다.

 

양들은 발가 벗고 바깥 들판에서 한 겨울을 납니다. 그것에 대해 양들은 아무 저항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따뜻하게 입기 위해 추운 겨울에 털을 모두 깍아 버리는 사람들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양들의 이런 모습에서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양이라는 이미지가 우리를 지칭하기도 하고 어린양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양은 그냥 모욕을 당하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 양들이 오직 자기 생명을 보호 받기 위해 유일한 것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목자가 양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를 철저하게 따라 다닙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란 비천한 직업이었는데 한 번 나가면 몇 달을 양들과 함께 풀을 찾아 다닙니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 밤샘을 하기도 하는데,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양들을 치는 목자들이 여러명이 모입니다. 임시로 울타리를 치고 다 몰아 넣읍니다. 혼자서 양들을 지키는 것보다 여럿이서 지키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날이 밝으면 먼저 일어난 목자가 휙 휘파람을 불고 길을 나서면 양들이 자기 목자를 알아보고 한마리 한마리 따라 나섭니다. 목자들도 자기 양들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수 백 마리가 한데 섞여 있어도 자기 양을 알아 봅니다. 다른 목자가 또 휘파람을 불면 자기 양들이 따라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 몇 달을 돌아 다닙니다.

 

양들은 목자가 없으면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 자신들도 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습니다. 자기 생명에 대해 책임질 수 없습니다. 고통이나 불행도 어느 날 갑자기 닥쳐 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 가면서 고통이 닥쳐 왔을 때 신앙 따로 삶 따로입니다. 너무나 신앙이 필요한 때 신앙을 잊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 나는 울타리다. 나는 양떼들을 몰고 다니는 목자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문), 그리스도 안에서(울타리), 그리스도와 함께(목자)" 라고 하는 경문은 이렇듯이 의미가 큽니다. 우리가 단순히 미사때마다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해결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쁜 일이든 힘든 일이든 예수님만이 나를 그 고통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삶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그 문제를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인간적인 수단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고, 보호 받을 수 있고, 우리의 생명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살았으면 합니다. 목자 곁에 머무는 것은 "내 어려운 삶의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가 첫번째가 아니라, "이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양들이 목자를 알아보는 것은 그것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목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목자가 소리칠 때 알아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들립니다.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신원식 신부님>

 

 

저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알아들을 때도 순순하게 따르기보다는, 고집을 부리며 딴 곳으로 가다가, 다시 헐레벌떡 목자이신 예수님을 찾는 모습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더 민감하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주파수를 맞추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음을 차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음은 관계안에서 오는 상처로 인한 것도 있고, 탐욕에서 나오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음을 해소하기 위해 상처의 부위를 주님의 자비의 빛으로 비춰주십사 기도해야할 것 같습니다. 또 탐욕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쓸데 없는 곳을 두리번 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돌아서야겠습니다.

 

주님,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 주님을 두고 양식도 안 되는 것을 얻으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헤맸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께서 그 때마다 자비로 일으켜 주셨음에 무한 감사를 드릴뿐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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