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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7,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12 조회수1,909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7,1~6)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1ㄴ~2)

 

루카 복음 17장 1~10절루카 복음 9장 51절~19장 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후기 활동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최후의 순회 선교 여행을 떠나시기 직전(17,11)

베레아 지방의 활동(14,1~17,10)의 마지막 시점에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그리고 17장 1~10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1~4절까지는 성도들의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이웃과 수평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고, 5~10절까지는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 1~4절의 전반부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에 대한 경계(1~3ㄱ절)와

형제간의 상호 용서에 관한 교훈(3ㄴ~4절)이 나오며, 5~10절의 후반부

진실한 믿음에 관한 교훈(5~6절)과 겸손한 봉사에 관한 교훈(7~10절)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레아 지방 활동을 마감하시며, 주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주요한 덕목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면서, 루카 복음 15장, 16장에

나오는 비유들을 총정리하시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임을 밝히신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1~2절 마태오 복음에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이야기와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마태18,1~7).

 

하지만 마태오 복음에서는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함으로써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소외되고 멸시받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교훈을 여러 장소에서 여러 번 주셨기에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부정적 의미를 지닌 단어'아넨덱톤'(anendekton;

impossible)'스칸달라'(skandala; offences)를 사용하셔서

강조하시고자 하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신다.

 

새 성경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로 번역된 '스칸달라'(skandala)의

원래 의미는 '덫'(trap)이나 '장애물'로서 '올무', '부딪히는 돌',

'거리끼는 것'으로 성경에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형제를 유혹에 빠뜨리거나 교리 혹은 가르침 등으로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며,

세상에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늘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다.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아넨덱톤'(anendekton)'가능하다', '허락하다'

뜻이 있는 '엔데코마이'(endechomai) 동사에 부정 접두어 '아'(a)가 결합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불가능하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다시 부정 불변사인 '메'(me)와 연결되어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그러한 유혹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에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현실 극복에 대한

강인한 지향이 있어야 됨을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강조 어법으로

제자들에게 촉구하시고 있는 것이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8장 6절마르코 복음 9장 42절에는 '연자매'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 a millstone)가 나온다.

 

여기서 '연자'에 해당하는 '오니코스'(onikos) '나귀'(루카14,5)를 뜻하는

'오노스'(onos)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따라서 '연자매', '연자 맷돌'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나귀의 힘에 의해 돌리는

커다란 맷돌'을 말한다.

 

이것은 집안에서 사용되는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과는 달리

많은 곡식을 한꺼번에 빻기 위해 사용되는 큰 맷돌이었다.

 

루카 복음 17장 2절에는 '리토스 뮐리토스'(lithos mylikos; a millstone)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맷돌에 속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이것의 용도는 곡식을 가는 것인데, 때로 이방인들은

이것을 형벌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의 로마 처형법 중에 하나는, 이 돌의 구멍에 목을 매게 해서

바다에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처형 방법은 영적 세계에 무지한 이교도들이 바다에서 죽은 자들은

사자(死者)들이 머무는 세계로 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왔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들이 죽은 물 위에서

영원히 방향도 없이 떠돈다고 생각했다.

 

보통 맷돌에 사람을 묶어 바다에 던져도 가라앉는데, 하물며 대형 맷돌에

목을 매어 빠뜨리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음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자매에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하는 죽음은

장례를 지낼 수 없는 죽음으로써 최악으로 여겨졌다.

 

한편, '걸고''내던져지는 편'으로  각각 번역된 동사 '페리케이타이'

(perikeitai; that were hanged; that were tied)'에르맆타이'

(erriptai; be thrown; be cast)는 중간태 내지는 수동태로서,

남을 죄짓게 한 당사자가 제3자,사법당국에 의해서 수장되는

형벌을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걸리어지는 '그 목'은 죄짓는 작은 이의 목이 아닌, 작은 이를

죄짓게 한 당사자의 목이며, 그 목에 연자매를 매고 바다에 던지는 주체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법당국이다.

 

그리고 '낫다'에 해당하는 '뤼시텔레이'(lysitelei; it would be better)

본절에서 '더 좋다'(it is better)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세금을

지불하다'는 뜻으로서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작은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은 준엄한 형벌이 반드시 주어짐을 전제하는

동시에, 차라리 이러한 형벌이 더 낫다는 이중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작은 이'(one of these little ones), 연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해서 내세에서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는 것보다,

바다에 수장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그 개인에게 낫다는 의미이다.

 

내세에서의 형벌의 막중함은 연자매에 달려 수장당하는 형벌에 비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은 남들이 보잘것 없게 여기는 작은 이,

소외된 이웃이나 스스로 힘으로 설 수 없는, 믿음이 연약한 이들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시 로마 사회에서 흔히 시행되던 가혹한 형벌을 언급한 것은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을 애타는 심정으로 막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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