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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단순함, 버리고 비우기에서 오는 자유로움
작성자송규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6-05-04 조회수597 추천수3 반대(0) 신고

[91호(2006년 봄호)] Simplicity, The Freedom of Letting Go (단순함, 버리고 비우기에서 오는 자유로움)-홍순영(로사)번역
 글쓴이 : 성심인간계발원

Simplicity, The Freedom of Letting Go

(단순함, 버리고 비우기에서 오는 자유로움)



홍순영(로사, 편집부)  번역

     

  우리의 내면세계는 지나치게 세심하며 복잡해서 가히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수 백 년 동안 우리는 다양한 학술적, 문화적 진보와 함께 인간의 이성과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이 인간의 dilemma(궁지, 위기)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주는 위대한 선물을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온갖 혼란에 빠진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어떤 일에 대해 보다 상세하고 예리한 분석이 반드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혜로움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선택의 기회가 더 많은 자유를 뜻하지도 않는다. 또한 재물의 축적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며, 과학 기술로 인해 절약된 시간은 좀처럼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삶에의 명상 즉 자아를 들여다보는 일에 쓰이지 못한다.  

  진보는 세상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고 인간의 이성은 너무 쉽게 전쟁과 탐욕과 그 이외 추한 것들을 합법화시켜 버렸다. 세상이 하느님의 원칙과 원리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린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잘못과 허상들을 우리 안에서 버려야만 할 뿐 아니라 마음속의 온갖 갈등과 욕망과 실망과 좌절 등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지 않는 감정들을 버리고 비워야 할 때이다. 버리고 비움으로써 간결해지고 자유로워진 가슴속에 하느님의 평화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Empty mind is filled with peace of God)

 

God the Father and God the Mother (아버지이며 어머니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하여 논의할 때 마다 항상 논쟁과 오해가 있기 마련인데, 하느님을 온전히 그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의 egocentricity (자기중심적임)가 하느님을 그 자체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시시각각 원하고 필요로 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 이미지이며 우리 자아의 투영물인 것이다. 미국인에게는 하느님이 Uncle Sam 혹은 산타클로스일 수 있으며, 영국인에게 하느님은 대영제국이며, 스위스의 하느님은 어쩌면 은행가나 혹은 심리학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를 온전한 믿음으로 이끄는 여정은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이미지와 또한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모두 놓아 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로, 혹은 교회의 설교로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마음을 비우고 겸허히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산타클로스도, 제우스적인 강한 남성도 아닌 부드러움과 동정심과 자애로움으로 가득한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기도하면서 그는 자신의 자아 이미지를 버렸다. 자신을 비우는 일. 그것이 그 분의 단식의 참된 의미였다. 예수님이 자신을 버리고 비웠을 때 비로소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셨고“내 사랑하는 아들아!”하고 부르셨다.  


As we grow, our image of God and our self-image move forward on parallel tracks.

(우리가 자라면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와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대개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


  사제들을 위한 묵상이나 상담을 하면서 나는 놀랍게도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가 그들이 어렸을 적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미지의 혼합물임을 발견했다. 그들의 어머니가 몹시 비판적이었을 경우 그들의 하느님도 역시 비판적인 하느님이었으며, 그들의 아버지가 냉정하고 근엄한 사람이었을 때는 그들의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냉정하고 근엄한 하느님이었다.

  우리는 하느님이 정말로 누구이신지 알기 위해서 그러한 잘못된 무수한 이미지들을 버려야만 한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광야에서 자신을 비우는 사람들은 항상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하느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People who empty themselves in the wilderness always meet a God who is greater than they would have dared to hope)  


  사람들이 견실한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하는 곳 바로 그들 가운데에 하느님이 계신다. 자칫 형식과 권위에 치우치기 쉬운 교회보다 자신을 비우고 신의와 사랑으로 모인 곳에 하느님의 치유와 무한한 사랑과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캔사스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아일랜드 출신인 우리 성당의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주일학교에 다니는 우리들에게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말하길 “너희들이 천국 가까이 가면 베드로 성인이 문 앞에 서 계실거야. 물론 그에게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지만 그는 남자야. 만약 너희들이 천국의 문 안 쪽을 살짝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볼 수도 있어. 그리고 예수님 옆에는 빛에 둘러싸여 왕좌에 앉아 계시는 긴 수염의 할아버지도 계시지. 하지만 예수님도 역시 남자라서 그들은 쉽게 문을 열어 주지 않을 지도 몰라. 하지만 비밀의 문이 있단다.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뒷문으로 가 봐. 그리고 네가 착한 아이이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친다면 마리아가 뒤 뜰 창가에서 로사리오를 내려 주실 거야. 그러면 너는 그 로사리오를 타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단다.”엉터리 같은 신앙 교리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The Existence of the Devil(악마-사탄의 실재)


  신학생 시절에 나는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지 우리가 만들어 낸 허상의 존재가 아닌지를 교수 신부님께 질문한 적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뉴멕시코의 많은 인디안들은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원자 무기들을 만들어 내고 과학이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지금 그들은 곳곳에서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exorcism(무속)을 행하고 있다. 두 가지의 극단이 있다. 악마의 존재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그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든가 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우리를 시시때때 노리고 유혹하는 너무 많은 악마들을 보았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 사탄의 존재를 부인할 수가 없다.  


Richard Rohr

      성심인간계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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