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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타나엘 (요한1:45-5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05 조회수1,994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타나엘 (요한1:45-51)

(요한1:45-51)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은 1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나타나엘의 이야기입니다. 나타나엘은 이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사람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나엘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발토로메오일 것이라 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요한복음 이외의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 발토로메오는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발토로메오는 헬라어로 ‘bar-tolmai'입니다. 그 말은 ’bar'가 아들이라는 뜻이므로 ‘tolmai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가끔 베드로를 ‘bar-jona'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지요? 그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뜻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톨마 이의 아들 나타나엘이 바로 발토로메오라고 표기가 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게다가 공관 복음서에 보면 항상 발토로메오가 필립과 함께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필립의 전도를 받은 나타나엘이 바로 발토로메오일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공부 하는 본문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나타나엘도 역시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그 구절이 담고 있는 주요 메시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필립이 나타나엘에게 가서 우리가 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록한 메시아,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하고 반문합니다. 그 말은 나타나엘이 율법에 능통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는 미가서의 예언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미가서 51절에 보면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는 구절이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 왕 시대의 예언자 미가를 통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날 것임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 예언을 나타나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절을 통해서 나타나엘이 메시아가 나실 곳은 그런 허름하고 초라한 시골 동네일 리가 없다는 민속 메시아사상도 또한 갖고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분명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그랬더니 필립이 나타나엘에게 와 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타나엘을 보자마자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짓이없다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돌로스속이는 자’ ‘간사한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 그런 사람이 있었지요? ‘속이는 자’ ‘간사한 자하면 생각하는 사람. 바로 야곱입니다. 게다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 아닙니까? 주님은 간사한 자와 이스라엘을 동시에 등장시켜, 다른 말로 야곱과 이스라엘을 등장시켜 그 둘을 비교하며 무언가를 설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주님은 지금 나타나엘과의 대화를 통해 육적 이스라엘의 대표인 야곱과 이름이 바뀐 이후의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깜짝 놀랍니다. 그리곤 주님께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건 좀 엉뚱한 대답입니다. 보통 칭찬을 받으면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법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나타나엘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자신을 칭찬하는 말씀이 아니라 뭔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 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라는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이 그 말을 듣자마자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 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 팔레스타인에서 번식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당시 랍비들이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을 하는 장소로 즐겨 사용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자주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를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내가 너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시니까 깜짝 놀란 것입니다. 거기서 보았다라고 번역이 된 에이도는 단순히 예지적 (叡智的)인 측면뿐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이 깜짝 놀라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엘이 주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을 한 것은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무엘하 7장으로 가서 다윗의 언약의 몇 구절을 보고 설명을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7:12-13)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사상이 시작 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느님께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일부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의 한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해서 다윗 왕조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느님을 대신해서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자로 그를 세워서 하느님의 아들을 삼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다윗 왕조가 성립이 되었고 솔로몬이 다윗의 씨로 하느님의 아들이 돼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하느님 대신 통치했고 성전도 지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조가 지속될 때는 나단의 神託에 근거해서 다윗 자손이 왕위에 오를 때마다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등극할 때 시편2편이나 89, 132편 같은 메시아의 노래를 합창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나단을 통해 했던 언약은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곡해한 것입니다.

이 나단의 신탁이 육적 이스라엘과 육적 다윗의 후손을 향한 하느님의 언약이었다면 다윗의 후손과 다윗의 왕국이 영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졌고 (BC931) 북 이스라엘이 BC722년에 멸망하고 남 유대마저 BC586년에 멸망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당황했지요.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은 사무엘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언약을 메시아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나단의 신탁은 하느님께서 미래의 어느 날, 종말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 다윗의 씨를 일으키시고 다윗 왕조를 재건하시고 그 다윗의 씨가 하느님 대신 하느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재현하실 것이라는 메시아사상으로 둔갑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민속 메시아사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바로 그 민속 메시아사상을 신앙처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나타나엘도 그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고민하고 묵상하던 것을 아신다고 하자 이 분이 바로 나단의 신탁에서 예언된 그 메시아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타나엘의 고백은 충분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다윗적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1절에서 나타나엘의 신앙고백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1:51) 51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지금 나타나엘에게 네가 지금 나를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너는 나를 민속 메시아로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참 메시아는 단순히 너희들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주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 하늘을 열고 땅과 하늘 사이에 중보자로 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타나엘을 칭찬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분명 주님은 나타나엘에게 이가 참 이스라엘이다. 그 마음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것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나타나엘이 비록 민속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선민사상이나 율법주의에 의해 하느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그 하느님의 언약이 이루어짐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고민 끝에 깨달은 사람이 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단순히 나타나엘 한 사람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엘을 들어 전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참 이스라엘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얍복강 가의 씨름 이전의 야곱과 씨름 이후의 이스라엘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그 하느님의 복은 은혜로 자연스럽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축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것을 얻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이 틀렸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꾀로 아버지와 형 에사오를 속였습니다. 그 결과 축복을 받아내기는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 행위를 속이는 짓, 간사한 짓, 궤계’ ‘돌로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기꾼 야곱과 대조되어 등장하는 참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축복은 자신의 꾀나 힘으로 얻어낼 수 없는 완전한 은혜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그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선민 이스라엘 사람이고 제사도 드리고 율법도 지키는데 그 것이 그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행위나 종교적 행위로 하느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묵상하고 고민하며 하느님의 언약의 축복은 결국 은혜라는 결론을 내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보자마자 그는 마음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고 내가 너를 무 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추론이 가능한가? 함께 추적해 보자구요.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온갖 꾀를 다 써서 결국 부자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 돌아왔는지 아세요? 야곱은 자신의 지혜로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하느님의 언약의 축복을 얻어내긴 했지만 정작 언약의 땅에서는 쫓겨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하느님의 언약의 축복은 하느님의 축복의 땅에서만 유효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의 언약의 땅으로 돌 아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축복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식솔들과 하인들 그리고 가축들을 이끌고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형 에사오400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은 에사오에게 죽게 될까봐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얍복 강가에 이르자 자기에게 덜 소중한 순서대로 강을 건너게 합니다. 육축과 하인들, 하인 출신의 아내들과 자녀들 그리고 레아와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헬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봅니다. 여차하면 혼자라도 도망할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하느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야곱과 씨름을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포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겨루기가 아닙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위골이 되게 만드시지요? 환도뼈를 치실 수 있는 분이 씨름에서 못 이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그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겨루기가 아니라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씨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품을 떠난 타락한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스스로 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기 외부의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까지도 자신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데 필요한 도구요 방법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느님의 생명력과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 힘을 축적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움 없이도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살게 됩니다.

얍복 강가의 야곱은 바로 그 죄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하느님까지도 이기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협박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을 굴복시키겠다는 의도로 행해지는, 하느님은 그러한 야곱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그러한 야곱들에게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게 바로 환도뼈를 치시는 하느님입니다.

고집스러운 야곱 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축복을 얻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야곱들에게 너희들 힘으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 다른 말로 언약의 땅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환도뼈가 위 골 시켜 절게 만드시더라도 가르치시고 야 마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이 되자 그 때서야 약하디 약한 자신의 실존을 실감합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자신을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 놓지 않겠다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이 매달림은 은혜를 향한 매달림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의 땅은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야곱이 안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축복의 땅에 입성할 수 있음을 안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이름이 나타나엘에게 붙여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의 환도뼈를 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품어 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의 전인(全人)’이 살해되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탄생이 되는 현장이 바로 십자가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은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그 일을 이루려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폭격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하느님의 축복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씨름하며 깨달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께서 베델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축복의 언약을 하실 때 야곱이 뭐 대단한 일을 했을 때입니까? 야곱은 자신의 꾀로 축복 의 땅에서 쫓겨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은 야곱아 네 힘으로는 넌 그렇게 축복의 땅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는자다. 이제 알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를 반드시 내 힘으로 가나안으로 데려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처음부터 야곱에게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주지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매한 야곱들은 그 것을 깨닫는 데 아주 오랜 세월을 허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야곱이 끝까지 삽니까? 아니지요? 야곱은 아시다시피 애굽에서 죽습니다. 어떻게 야곱이 그 축복의 땅 가나안을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얍복 강가의 씨름 이후에 은혜를 깨닫게 되자 베델의 사건 또한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주실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열린 하늘을 통해서 본,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던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단지 상징으로 주어졌던 가나안 땅을 쉽게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통해 주어지게 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되자 야곱은 세계관이 확 바뀌게 됩니다. 이 땅의 권세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재물로 하늘의 복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거의 거지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파라오에게 축복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나타나엘과의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참 이스라엘은 어떠한 자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해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이 창세기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권고를 하신 것일까요? 이 대화의 배경이 되는 구약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공부하신 창세기 28장과 다니엘서 7장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이 창세기 28장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유대인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인 ‘Genesis Rabba'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Genesis Rabba'는 구약의 아람어 번역판 탈굼의 창세기를 유대인 랍비들이 주석해 놓은 책입니다. 그 주석 집을 보면 유대인들 선민사상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지가 아주 명확하게 나옵니다.

유대인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인 ‘Genesis Rabba'가 창세기 28장의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 은 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길에 길에서 잠이 들었다가 거기서 하느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언약을 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주해를 합니다.

야곱이 에사오에게 쫓겨서 자기 집을 떠나 어미의 고향으로 가는 중에 천사들이 호위한다. 야곱이 베델에서 잠이 들자 천사들이 야곱의 잠든 얼굴을 훔쳐보고, 하늘을 열고 올라가서 하느님의 어좌에서 시중들고 있던 다른 천사들에게 하느님의 어좌(御座)에 앉아 있는 야곱의 얼굴을 한번 보려면, 땅에 내려와 베델에서 잠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라고 하자 천사들이 줄을 이어 내려와 그의 얼굴을 보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말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실체는 이미 하느님 어좌(御座)에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이 너무나 거룩해서 천사들도 쳐다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야곱의 모조품 얼굴을 땅 위에서 볼 수 있었고 하느님의 어좌(御座)에 앉아 있는 진짜 실체의 위대함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해가 전혀 말이 안 되는 주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랍비들의 주해는 다분히 육적 이스라엘의 자부심을 내포하고 있는 주해인 것입니다.

이 주해는 유대 민족의 복음으로 갖고 있었던 언약신학적 주해입니다. 유대인들은 야곱은 하느님 백성의 조상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은 그 야곱 자신 안에 내포된 존재로 인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이미 하느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창세기가 모 세에 의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랍비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야곱 안에서 이미 하느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선민이며 천사들의 섬김과 예배를 받도록 약속 받고 숙명 지워진 민족이라는 자위적 해석을 했었고 그 해석이 15세기 동안 유대인들의 신앙화되어 흘러 내려왔던 것입니다. 이 해석에서 야곱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가고 육적 이스라엘의 자리에 교회가 들어가면 정확한 해석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유대인들은 다니엘서 7장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곡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니7:9-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1 그 뒤에 그 뿔이 떠들어 대는 거만한 말소리 때문에 나는 그쪽을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짐승이 살해되고 몸은 부서져 타는 불에 던져졌다. 12 그리고 나머지 짐승들은 통치권을 빼앗겼으나 생명은 얼마 동안 연장되었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다니엘이 사자, , 표범, 그리고 뿔 달린 이상한 짐승 이렇게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그러한 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온 세상을 지배하며 하느님의 백성들을 못 살게 굽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환상의 끝에 하느님의 어전 회의 모습을 환상으로 봅니다. ‘어좌(御座)이 놓이고 (번역 성경에는 그냥 왕좌라고 단수로 표기했지만 아람어 원문 은 코르쎄복수이다)’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즉 하느님이 좌정 하시고 그 앞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예배하고 섬기는 가운데 심판을 벌여, 앞의 짐승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다니엘이 봅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니엘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하느님께 나아와서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것을 봅니다.

다니엘은 그 인자가 구름을 타고 왔다고 기술을 함으로 해서 그 인자가 신적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장면은 그 신적 존재인 인자가 하느님 어좌에 등극해서 하느님에게서 대권을 위임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는 등극 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구절을 보면 그 권세를 하느님의 백성들이 받습니다. 그러니까 인자가 하느님의 백성들을 품고 있는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다니엘에게 그 환상의 뜻을 해석해 줍니다. 그 네 짐승들은 차례로 일어나 세상을 지배할 이방 왕들과 그들의 왕국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무참히 핍박할 것이지만 하느님이 결국 그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키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하느님 우편 어좌에 앉히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니7:26-27) 26 그러나 법정이 열리고 그는 통치권을 빼앗겨 완전히 패망하고 멸망하리라. 27 나라와 통치권과 온 천하 나라들의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되고 모든 통치자가 그들을 섬기고 복종하리라.’

'Genesis Rabba'의 창세기 28장 주석과 내용이 흡사하지요? 이게 유대인들의 언약신학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본문을 하느님의 예언자 다니엘이 하느님의 언약 신학에 근거해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 더와 그의 후계 왕국들의 통치 가운데 이스라엘이 짓밟히고 있는 현실로 인해 유대인들이 지닌 하느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이 약해지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분의 약속을 꼭 지키실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 선민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성경의 그 약속들 이 선택된 육적 이스라엘인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다니엘서의 내용은 영적 이스라엘’, 다니엘서의 표현을 빌리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聖民들을 대표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 그 성민 들을 품에 품고 하느님으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대권을 이어받게 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성민들이 바로 육적 이스라엘인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그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완전히 박살내고 계신 것입니다.

51절을 잘 보시면 주님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품고 하느님의 어좌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야곱의 자리에 다니엘서의 인자를 끼워 넣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다니엘서의 인자가 대표하는 것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성민 (聖民)이 맞다. 그러나 그 성민(聖民)은 야곱을 조상으로 하고 있는 너희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인자인 나로 말미암아 탄생되는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다그래서 벧엘에서의 야곱의 환상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 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것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잘 그려보세요. 창세기에서는 야곱의 머리위로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었는데 요한복음 1장의 주님의 말씀 속에서는 인자’ ‘예수 그리스도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유대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언약 신학을 배경으로 해서 유대인들만의 복음이 아닌 참 복음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렇게 우리의 꾀나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측에서 보면 거저지만 하느님 측에서는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환도뼈를 맞아 얍복 강가의 야곱이 되셔서 죽으시고 이스라엘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사다리가 되셔서 우리가 이제 하늘로 연결이 되어 하느님의 축복인 바라크를 풍성하게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늘이 열린 것을 보신 분들이지요? 맞습니까? 여러분도 얍복 강가의 씨름을 해 보신 분 들 맞지요? 우리는 단지 죄인일 뿐이며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지옥불로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아시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랑과 술수와 잔꾀와 힘을 모두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쫓아 주님께만 순종하며, 주님께만 이끌리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을 아시지요? 오늘 본문은 그렇게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하늘로 갈 수 있게 된 그 주님의 십자가를 더 큰 일이라고 합니다. ‘네가 이제 더 큰 일을 보리라

여러분은 바로 그 더 큰 일을 보신 분들인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이신 것입니다. 나타나엘이 부러워서 울고 갈 존귀한 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도 겨우 하룻밤 잠깐 환상으로 본 그 베델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것을 초개처럼 여기고 어떤 권세 앞에서도 당당했으며 오직 하늘만 소망하다가 갔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은 그 믿음을 통해 수시로 열린 하늘을 보시는 분들입니다. 야곱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은혜를 받으신 분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셔야 하겠습니까? 하루 밤 꿈으로도 평생을 하늘만 보고 살았던 우리 조상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열린 하늘을 통해 하늘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 맞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부터라고 좀 당당해 집시다. 좀 의연해 집시다. 오늘부터라도 좀 세상 것들로부터 초연해 집시다.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참아줍시다. 비록 그러한 삶이 힘이 들지라도 우리는 겨우 발뒤꿈치를 물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사탄의 머리를 짓밟아 뭉개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영웅주의, 물질주의, 성공주의로 여러분에게 선악과를 내미는 사탄의 머리를 짓밟아 버리십시오. 절대 그 미혹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신분에 맞는 삶을 열심히 경주하며 사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 온갖 권모술수와 잔꾀를 부리는 야곱이 아니라 이제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느님이 주시는 언약의 땅인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그 곳을 향해 열심히 달리시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마세요. 부지런해지십시오. 게으름은 우리 성도들의 최고의 적입니다. 아니 정말 성도의 삶이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게으를 틈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의 비유가 나오지요? 그 때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표현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여기서 착하다, 악하다라고 하는 것은 내면의 존재적 성품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뒤의 충성되다, 게으르다는 그 존재적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외적 삶의 총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한 자, 다른 말로 선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성을 보이게 되어 있고 여전히 악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면의 존재적 성품이 이미 선하게 변하신 분들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말씀 따라 사는 일에 충성을 다하십시다. 일찍일찍 주무시고 일찍일찍 일어나셔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힘쓰며 가정과 직장과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셔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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