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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믿음, 용기, 구원, 따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29 조회수352 추천수0 반대(0) 신고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마르코 10, 46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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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앉아 있다가 외치기 시작하였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시다. 
그는 용기를 내어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 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는 눈먼 거지입니다. 길가의 거지였으니 그에게는 하루 먹을 양식을 위한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는 예수님께 양식을 먹게 해달라고 자비를 외친게 아닙니다.

눈먼 거지에게는 두 가지의 어려운 처지가 있습니다.눈이 멀다는 소경의 처지와 돈이 없다는 거지의 처지입니다.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는 단순히 주린 뱃 속만을 채우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간절한 '예수님의 자비'는 분명합니다.굶주린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내려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하지만 예수님에게서 그것은 전부가 아니셨습니다. 지금 구제가 아니라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서, 가난한 이들의 주린 뱃 속을 채워 주시는 예수님의 행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먹을 빵을 위한 돈'에서 이스카리옷 유다가 말합니다.“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매일 먹을 양식이라든가 혹은 이를 위한 돈의 필요가치가 없다는 것을 게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우리는 무엇이 더 더욱 소중한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행합니다.

돈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돈을 더 모으는데 신바람을 냅니다. 돈이면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처럼 큰 잘못된 착각에 빠집니다. 돈이면 다 되어진다는 그런 불행입니다. 신바람은 예수님 보다도 돈에서 생겨납니다.

돈(이윤 계산) 때문에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은 정녕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마음에서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버려진 이들에게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에서 해방되어지는 예수님의 구원을 소홀히 여깁니다.

마음은 있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합니다. 자기의 (공동체의)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게 아닙니다. 돈이 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하니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따릅니다. 

안타깝게도 돈의 지배를 받는 자신과 공동체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돈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돈에 신바람이 난 것입니다.대신에 고통과 죽음은 점점 더 설칩니다. 문제를 문제로 올바로 볼 수 없게 되어집니다.

마음 속에는 돈(이윤) 계산 뿐입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따져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헤아려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과 죽음에 그리스도적인 고통으로 그들과 결합할 수 없다는 설명입니다. 

돈에 눈이 밝아지자 (이윤 계산에 밝아지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돈(이윤)의 제자들로 변질되어져 버립니다. 돈을 얻고자 하면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함입니다.즉, 술을 얻고자 하면 술의 지배를 받게 되고 세상을 얻고자 하면 세상의 지배를 당한다는 것을 등한시 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유혹'에서 예수님께서 겪어신 세상 영광에 빠진 자신과 공동체입니다. 세상 영광이 아니라 (돈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바라야만 했습니다. 그럴려면 먼저 고통의 특권(그리스도적 고통)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먹는 구제가 필연적으로 악에서 해방되어지는 구원을 이루게 하지는 않습니다.  '구제와 구원의 차원'은 엄밀하게 다른 일입니다. 구제는 사람의 일이고 구원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일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돈의 영광을 따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제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적인 고통'이 당연히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예수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참된 제자 참된 공동체는 예수님과 같이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일치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적 고통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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