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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 보다 큰 아들이 된 수도자,사제 [학습된 말을 잘하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15 조회수352 추천수0 반대(0) 신고

 

'대화에 응하고자 드린' 글입니다.

 

2>5 [ 2는 5보다 크다 ], 5>0 [ 5는 0보다 크다 ], 0>2 [ 0은 2보다 크다 ]에서 이를 [ 더와 덜 ]의 숫자 차원에서 보면 맞지 않습니다. 님의 글에서 처럼 [ '더와 덜'이 양과 무게(질)이다 ]할지라도 언제나 님의 글은 숫자의 차원일 뿐입니다. 즉, 양과 질의 차원입니다. 그래서 님께서는 [ 더와 덜 ]을 누가 정하느냐고 말합니다. 000님(2013/09/15) : 분명히 저 말씀은 더와 덜 ( 수, 양, 무게를 포함)이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이 해야 할 사랑의 양, 수, 무게는 누가 정해서 이 만큼 해야 한다고 명령 할 수 있을까요 ... / 라고 글을 씁니다. 사랑의 양, 수, 무게는 모두 [ 숫자의 차원 ]입니다. 숫자의 개념으로 학습된 숫자의 차원입니다.

복음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에서 숫자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님께서는 [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이 해야 할 사랑의 양, 수, 무게는 누가 정해서 이 만큼 해야 한다고 명령 할 수 있을까요... ]라고 거듭 말하십니다. 그리고 000님 (2013/09/15) : 신자들이 용서도 안하고 사랑도 안하는 것도 그렇고, 직무 사제직을 받은 분들이 그러할 때는 더 가혹하게 밀어 부칠 수 있는 권한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 라고 말하셨습니다.

님께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랑의 양, 수, 무게인 [사랑의 양과 질] 모두는 학습된 수량(숫자)의 차원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숫자(수량)의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예수님의 말씀 [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의 가르침은 '숫자의 차원'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2>5 [ 2는 5보다 크다 ], 5>0 [ 5는 0보다 크다 ], 0>2 [ 0은 2보다 크다 ]는 겉으로 보면 분명히 숫자입니다. 이처럼 [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는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숫자의 차원에 머뭅니다.

2>5 [ 2는 5보다 크다 ], 5>0 [ 5는 0보다 크다 ], 0>2 [ 0은 2보다 크다 ]는 숫자의 차원이 아니라, [ 2는 가위이고 0은 바위이며 5는 보 ]입니다. 가위, 바위, 보의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2>5 [ 2는 5보다 크다 ], 5>0 [ 5는 0보다 크다 ], 0>2 [ 0은 2보다 크다 ]에서 이를 [ 더와 덜 ]의 숫자 차원에서 보면 맞지 않지만 가위, 바위, 보의 차원에서는 맞습니다. 복음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숫자의 차원'이 아닙니다. 상기와 같은 <가위,바위,보>와 같은 전혀 색다른 차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 아들 ]에서 '숫자 차원'을 보고 있듯이, 아버지의 사랑(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 곧 [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는 숫자 차원이 아닙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 비하여 다른 차원입니다. 큰 아들은 숫자 차원에 머물렀고 [ 아버지 ]는 숫자 차원을 초월한 다른 차원입니다.회개한 죄인(탕자)는 그 회개가 향유의 여인과 같습니다탕자는 [ 아버지께 돌아온 ] 진정한 회개의 차원입니다. 향유의 여인도 [ 예수님께 돌아온 ] 진정한 회개의 차원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 아버지의 사랑 ] 차원은 모두 숫자의 차원이 아닙니다. 큰 아들은 탕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 예수님의 사랑 ] 차원이 아닙니다. 큰 아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에 해당되어지는 만큼 숫자 차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 큰 아들은 탕자를 사랑하지 ] 못합니다. [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큰 아들에게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특히 수도자,사제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이 언제나 남들을 용서하는 사람으로 그 자신을 여기기기도 합니다.

용서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 용서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도 용서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 ] 곧 자기 모습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하늘에서는 기뻐한다고 할 것입니다. 큰 아들은 [ 아버지의 사랑 ]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사랑 차원 ]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의 사랑 ]은 숫자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온 진정한 회개의 길에서 탕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 큰 아들은 회개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 곧 예수님의 사랑)이란 그 차원이 [ 숫자 차원에서 양, 수, 무게가 달라지는 사랑 ]이 아니라 보다 다른 차원인 <구원적인 사랑>의 차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차원입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 "세상이 사랑하는 사랑"의 숫자 차원 ]의 사랑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 ]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 사랑 ]은 인간에게서 오는 학습된 사랑의 차원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기 회개는 아버지(하느님, 예수님)께로 돌아감이므로 하느님, 예수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숫자 차원이 아니라 [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 모습의 차원인 것입니다. 학습된 숫자 차원이 아니고 가위,바위 보와 같은 모습의 차원과 같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들(그때의 율법학자,바리사이들,수석사제들,원로들)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비아냥,모해를 받았습니다. 향유의 여인과 탕자는 바리사이들과 큰 아들로부터 [ 아버지께, 예수님께 돌아왔고 이를 받아들인 예수님의 사랑 ]은 거부하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랑을 숫자 차원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과 큰 아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이 없다는 뜻입니다.

[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는 가르침은 세상이 사랑하는 학습된 숫자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모습(가위, 바위, 보 같은) 차원인 것입니다. /// 세상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하지 않지만 도리어 사랑한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 세상이 사랑하는 사랑(학습된 사랑) ]에서는 손가락질 하지 않지만 도리어 [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랑 ]에 대해서는 손가락질 합니다. 학습된 숫자(세속) 차원에 매여 사랑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 99마리를 내버려 두고 1마리를 왜 찾으러 가느냐 ]고 손가락질하는 사랑은 숫자 차원이지만 [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 차원은 학습된 사랑 숫자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 [ 하느님에게서 나신 예수님 ]에게서 드러나는 [ 사랑에서 나신 사랑 ]은 '세상이 사랑하는 숫자 차원의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 1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그리스도적 고통의 사랑 ]의 차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큰 아들은 [ 예수님의 사랑 차원 ] [ 아버지의 사랑 차원 ]을 학습된 숫자 차원에 매여 멸시하고 조롱하며 모해하여 [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모습 ] 차원을 죽이고 맙니다.복음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는 사랑의 차원은 바리사이들, 큰 아들에게서 보여지는 세상이 사랑하는 사랑, [ 숫자 차원의 학습된 사랑 ]이 아닙니다. 1마리 양,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드러나는 [ 세상이 사랑하는 사랑이 아닌,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랑 ]의 차원인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 [ 이 사랑 때문에 ] 예수님께서는 살해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앞장 섰습니다. 오늘 수도자, 사제와 같으신 분들이셨습니다. 지금 시대이다고 그 당시와 완전히 달라진 '인간사'는 아닙니다. 세상에서 학습된 사랑이 아닌,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미워하는 '인간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 예수님께로 돌아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모습 ]을 드러내는 사랑의 차원이 됩니다. 수도자,사제들이 이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예수님 제자들다운 사랑의 차원이 더욱 요청됩니다.

 

 

<참고>

말씀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게] 숫자 차원입니다. 학습된 차원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차원은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 다] 아닙니다. 2>5 [ 2는 5보다 크다 ], 5>0 [ 5는 0보다 크다 ], 0>2 [ 0은 2보다 크다 ]에서 이를 [ 더와 덜 ]의 숫자 차원에서 보면 맞지 않습니다.

[ 2는 가위이고 0은 바위이며 5는 보 ]입니다. 가위, 바위, 보의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2>5 [ 2는 5보다 크다 ], 5>0 [ 5는 0보다 크다 ], 0>2 [ 0은 2보다 크다 ]에서 이를 [ 더와 덜 ]의 숫자 차원에서 보면 맞지 않지만 가위, 바위, 보의 차원에서는 맞습니다.

손가락으로 '가위' 해 보세요. 가위는 2입니다. 손가락으로 '바위' 해 보세요. 0입니다. 손가락으로 '보'해 보세요. 손가락이 몇입니까. 5입니다. 보는 손가락이 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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