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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57) 고래가 등 터지고도 말 못하는 사연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13 조회수571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4월13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자 기념 없음 ㅡ탈출기12,1-8.11-14; 코린도 1서 11,23-26; 요한13,1-15ㅡ

 

                  고래가 등 터지고도 말 못하는 사연

                                                           이순의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은 당연하나 새우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지는 것은 좀 의아 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런 속담을 전해 오고 있다. 그에 비례하여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 라든지,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본다 라든지,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를 비유하고 있다. 고래든 어른이든 개든 상대에 비하여 결코 당할 만한 비유가 되지 않는 주체들이다. 그럼에도 고래는 등이 터지고, 어른은 체통없이 싸움질이며, 개는 잡지도 못할 닭을 쫓느라고 폼만 엄청나게 잰 격이 되고 말았다. 고래는 등이 터졌으니 죽어야 하고, 어른은 실속없는 철부지가 되어야 하고, 개는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는 입장에 서고 마는 것이다.

 

이럴때 고래도 어른도 개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게 큰 등치에 고래가 새우 탓을 한들 용궁의 백성들이 알아줄 것이며? 철 지난 어른이 시덥잖은 소재로 언성을 높인다고 주변에서 잘한다고 역성을 들어줄 것인가? 개는 공연히 털만 날리고 달구새끼만 더 높이 쫓았다고 빚자루 세례나 받지 않으면 다행인 처지다. 그러니 고래도 어른도 개도 분을 삭히고 자빠져 있어야 중간은 갈 것이 아닌가?! 분해도 머저리 취급이라도 안당하려면 어쩔 수가 없는 지경일 것이다. 그런 일이 내 집에서 벌어졌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다.

 

더구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대안도 없다. 새우는 싸웠으면 끝이지 고래가 등이 터지건 말건 알바가 아니다. 어른이 싸웠든지 말았든지 아이들은 다음 날로다가 친구하고 논다. 분통 터지는 것은 어른 사정이지 애가 알바가 아니다. 닭도 마찬가지다. 개새끼가 주인한테 빚자루로 맞든지 몽둥이로 맞든지 꼬끼오 노래나 부르면 된다. 세상에는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다고 하지만 이런 일처럼 딱하고 한심한 지경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런 속담들을 만들어 그 입장을 위로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사순시기의 최대의 축제인 성목요일을 넘기지 않고 남은 찌꺼기를 짜 내려고 한다. 아무래도 부활은 새로운 기쁨이어야 하고, 마음에 남은 감정은 헌 시련이었으므로 이렇게 쓰는 한 토막의 묵상글로 사람이 처한 노릇을 비워낼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경험들에 위로를 드리고, 어쩌겠느냐고 입을 다물고 삭히는 수 밖에 어쩌겠느냐고 위로를 전해 드린다. 겨울의 시련이 길었었다. 성령께서 이렇게 저렇게 사람의 감정과 마음들을 다스려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들의 대학입학 등록금을 마련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또 빗을 얻으려고 동분서주 했을 것이고........

 

다행히 큰오빠께서 막내동생의 하나 뿐인 자식을 위해 학비를 보내 주셔서 목돈에서 오는 한 시름의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큰오빠네 큰아이가 혼례도 있고 하여 감히 그런 거금을 보내 주실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큰 일이 코 앞에 놓인 큰오빠께 도움을 요청할 엄두는 더욱 나지 않았다. 주신다고 해 보아야 일부 조금 성의 표현정도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등록금으로 인한 중압감도 합격 불합격 만큼이나 대비 되고 있었다. 그래서 늘 짝궁의 일을 도와 돈을 관리하는 시동생에게 입학금에 대한 당부를 아주 아주 오래 전 부터 신신 당부를 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결론은 시동생은 동업자라는 사람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세우더니 영업주인 형에게 단 한마디의 상의나 허락도 없이 이익금이라는 명목의 지분을 다 지불하고, 제 몫을 일부 가져가고....... 형에게는 줄 돈이 없는 상황을 펼쳐 놓은 것이다. 물건을 보내준 업주들에게 물건대금 송금해 주라고 마련해 준 형의 영업자본조차 회전할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 놓고...... 동업이라고? 이런상황이 오면 몸통만 동업한 그 사람이나 시동생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영업허가가 있는 짝궁이 그 모든 상황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장조카의 대학 등록금도 줄 수 없는 몰염치한 경우를 마련해 놓고도......

 

하도하도 벼라별 꼴을 다 지켜 봐야했던 세월이었으므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분노는 가중 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시동생이 일을하고 벌어가는 지분이 누구에게서 나오는 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은 영업허가가 없으므로 시동생을 엮었을 것이다. 장기간 산에가 있느라고 시장의 모든 업무를 동생에게 맡겨 놓은 짝궁의 영업허가가 필요했으므로 작은 푼돈 벌이의 이익을 배당해 주는 조건을 제시 하였을 것이고....... 그 작은 꽃감의 단맛에 시동생은 먹을만 했을 것이고! 내가 그런 상황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부분들을 눈감고 있었던 이유는 시동생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용돈벌이라도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은 짝궁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업자라는 사람이 결산도 없고, 의논도 없고, 자본도 없고, 짝궁의 영업에 어부지리로 붙어서 동업을 명목으로 거래를 하더니....... 그럴 수 있다. 사람이 사는데는 치열한 이익의 관계이므로 충분히 그렇게라도 해서 먹고 살려고 했다고 이해를 했다. 문제는 가게 영업자본도 없이 제 몫을 충분히 갈라서 찾아가고 겨울 한 철 동안 잠수를 해 버린 것이다.

 

전화도 안 받고, 음성을 남겨도, 기별을 하여도, 겨울 내내 꿩 구워 먹은 무소식인 것이다. 자식의 학비도 못 주게 된 짝궁은 시동생을 재촉하고...... 시동생은 외상 전표만 뭉텅이로 내비치고.....! 동업을 했으면...... 외상이 많아서 가게 자본 회전이 어려우므로 배당을 고르게 분배를 했어야 한다. 그런데 머저리 사춘인 시동생은 그 사람의 외상값까지 고스란히 다 짊어지고서 그 사람에게는 넘쳐나게 돈을 지출해버린 것이다. 사람이 사는데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장사꾼이 아무리 제 멋대로라고 해도 상도라는 것이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영업허가가 없는 사람이다. 간단히 말하면 무면허다.

 

그렇다면 제 밥줄을 곤경에 처할 만큼의 무례를 저질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득히 산에를 가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라서 시동생에게 가게를 맡겨 놓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사장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엄연히 짝궁은 윗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실적 도움을 제공하는 은인인 것이다. 그런데 모지리 사춘인 우리 시동생을 꼬드겨서 어떤식으로든 돈을 더 남을 만큼 땡겨가버렸다고 해도...... 제 외상값이 처해있고, 그 짐이 영업주인 짝궁의 자본에서 곤경에 처해야 한다는 상황을 안다면....... 기본 염치는 있었어야 한다. 잠수하여서 전화도 불통인 그런 사람을 착한 짝궁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막된 사람이라도 명절에는 전화라도 한 통화 해 주겠지?! 내 생각에는 명절에 전화해 줄 인간이라면 상도덕 자체를 깔아 뭉개버린 그런 몰상식의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짝궁은 오랜 세월을 시장에서 견디어 온 대선배로서 한가닥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전화를 해 주지 않았고, 역시 받지도 않았다.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래야 한다. 자기 찾아갈 것 남어지게 찾아갔는데 외상에 처하든, 물건대금을 못 주든, 형제 간에 싸움질을 하든, 사장 자식의 대학등록금을 주든지 못 주든지, 뭔 상관이 있을 것인가?! 모지리 사춘인 시동생이 감당할 몫이지 그 사람은 알 바가 아닌 것이다.

 

결국에는 짝궁이 시동생에게 뭐라고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설을 다 동원하여 싸움이 붙은 쪽은 언제나 나다. 거금을 주면서도 영업주이고, 장사의 선배이고, 인생의 선배이며, 자본의 근거지인 형에게 단 한 마디의 허락도 없이 제 멋대로 처신하는 시동생에게 내가 하는 말은 항상 같다. 형을 무시하지 마라. 그럴 때 마다 시동생은 형을 무시 한 적이 없단다. 시동생이 형을 따라서 장사를 한지가 16~7년에 살림을 통째로 맡아서 한지가 8~9년이다. 결코 쉽지 않았던 형의 세월동안 단 1%의 고통분담도 하지 않고 살아 온 동생이다. 그것은 나의 철칙이기도 하다. 무너져도 나만 무너진다.

 

그런데 시동생은 그 세월동안 고통분담만 나누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서류 정리 한 번 하지 않았으며, 나의 강요에 의해 두 해 동안 하던 서류정리 마저도 저런 상도덕도 없는 사람을 동업자로 내세워 하지 않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짝궁은 시동생이 얼마짜리 물건을 얼마에 팔은지도 모르는 영업주가 되었다. 아무리 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손해날 것 없이 몸통으로 동업을 해서 막보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남에게 목돈을 챙겨줘서 잠수하게 협조를 해버린 것이다. 혈연인 동생이 형의 앞길이 아닌 장조카의 앞길을 이런식으로 막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나는 집에서 날이면 날마다 짝궁과 싸우는 중에 새언니로 부터 입학금을 송금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흔적도 없이 새언니의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를 끊고 눈물이 눈물이 비가 되어......! 그럴때 나는 성령의 도움을 체험한다. 내가 달라고 해서 새언니가 줄 돈이 아니지를 않는가?! 있는 돈도 작은 아빠란 인간은 남에게 다 주어서 조카의 학비조달을 차단해 버리는데, 또 한 쪽에서는 막힌 조카의 학비를 지원해 주는 상황이 어데 내가 짜 놓은 각본으로 될 일인가?! 예시 당초에 동업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동업을 하자고 한 것이고! 예시 당초에 영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서류도 없는 운영을 하다가 윤곽을 상실한 것이고!

 

그러니 무식한 시동생은 상도덕도 없는 인간을 믿거라고 떠 받들어 형의 자본을 제 돈처럼 풍덩풍덩 내어 준....... 당연한 제 몫이라고 퍼먹은 인간이야 겨울 한 철 잠수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세상천지에서 형수에게 있는 욕설 없는 욕설 다 얻어 먹고, 또한 그 지경을 만들고도 있는 욕설 없는 욕설 다 하면서 제 잘난 맛에 사는 시동생은 닭똥 찌끌어 놓듯이 수금을 하여 들여 놓았다. 그런데 아직도 청산이 안되는 부분에 대하여는 또 내가 세상의 욕설을 다 끌어모아야 될지는 시동생만 알 것이다. 문제는 봄이 되어서 시장이 활기를 찾고, 아직은 산에 가지 않을 짝궁은 영업을 개장했다. 그리고 두 형제를 싸움판에 집어 넣은 그 사람도 시장에 나왔다고 한다. 당연히 짝궁은 한마디 거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없은께 갖다 썼제라우.>

 

차라리 <내 배 째시오.> 하는 게 더 신사적이지 않을까?! 짝궁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못난 동생을 둔 죄로 듣는 소리라고 접었다고 한다. 속 모르는 시장사람들은 자꾸만 자꾸만 <왜 같이 안해?> 라고 동업에 대하여 물어 오지만 짝궁은 할 말을 못하고 있다. 동료들에게 이런 상황을 말로 주워 세자니 명색이 사장인데 등신 같고, 침묵을 하자니 두 형제가 그 사람을 왕따를 시킨 것 같고, 참! 고래의 입장이 죽을 맛이지를 않는가?! 그런데 그 사람은 짝궁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의 흐름이 동업은 일부 암묵적 허용이 되고 있으나 허가 없는 독단적 영업은 할 수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짝궁이 산에 가서 농사를 짓는 동안에 직접 생산한 물건을 보내오면 판매를 시동생이 하면서 짝궁이나 나의 결제를 받아왔다. 그런데 시동생이 제 개인의 서 푼 짜리 이익을 위해 그 사람과 연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가게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조카의 등록금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게 될 줄을 제 형인 짝궁이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아무리 그 세월동안 단 한 푼의 자본을 투자해 보지 않고 판매만 해 온 시동생이라고 해도 운영상의 자금회전 만큼은 형수가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변명인가?

 

그러니 새우 싸움이 아니라 새우끼리 서 푼짜리 정분이 난 바람에 고래가 등이 터져버린 것이다. 등이 터진 고래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봄을 맞았다. 생업의 터전인 시장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 아직도 시동생은 그것을 모른다. 제 이익은 형의 영업에서 주어진 것이지 그 사람은 결코 득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무튼 그 상도덕도 없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크나 큰 결례를 안겨 주었고, 나는 짝궁에게 산에 가서 농사를 짓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동업은 하지 마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어찌되어서 이런지경이 마련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순시기 동안이라도 시댁식구들에 대한 분노를 삭혀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오늘은 최후의 만찬 날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며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라고 선포 하시는 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 한 명은 주님이신 예수를 팔러 나간다. 제정담당이었던 유다의 몫인 것이다. 어찌하여 나에게 저런 짝궁을 주셨고, 어찌하여 짝궁의 가족들은 저래야만 하는지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우리 주 예수님처럼 그것이 그들이 할 일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동생은 형에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말로는 형을 무시하지 않는다는데 행동도 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혈연인 형이고, 영업주인 사장이고, 인생의 선배이니 작은 일도 묻고 허락 받고 자문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동생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제 그릇이 형만큼 대차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말로는 형을 무시하지 않는다지만 하는 짓거리들은 형에 대한 존중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도 남은 미결산에 대하여 또 입에 욕설을 달고 준비 중이다. 나는 형과 다르다. 나는 고래가 아니다. 나 시집 오던 날에 영등포 단칸에 시댁어른들이며 가족들이 가득 앉아 있었는데도 새댁에게 국 한 그릇 끓여주지 않고 깍두기에 밥 준 사실을 잊지 않는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선물만 하나씩 받아서 가버리는! 그 장면 장면들을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또 다시 내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남과 합세하여 시동생이 지불하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결코 잊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래는 침묵할지라도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시집 오던 날에 깍두기에 밥 준 소리를 뱉게 되었듯이, 내 자식의 대학 등로금을 못 준 어미 아비 되어버린 일 또한 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유다 처럼 동업을 빌미로 한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고 해도 나는 결코 고래가 아니므로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침묵할 수 없는 마누라와 사는 고래도 참으로 불쌍하기 이를데가 없다. 돌아갈 수도 없는데...... 국을 끓여 줄 수도 없고, 등록금을 납부해 줄 수도 없는데.......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어짜자는 것인지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은 당연하나 새우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지는 것은 좀 의아 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런 속담을 전해 오고 있다. 그에 비례하여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 라든지,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본다 라든지,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를 비유하고 있다. 고래든 어른이든 개든 상대에 비하여 결코 당할만한 비유가 되지 않는 주체들이다. 그럼에도 고래는 등이 터지고, 어른은 체통없이 싸움질이며, 개는 잡지도 못할 닭을 쫓느라고 폼만 엄청나게 잰 격이 되고 말았다. 고래는 등이 터졌으니 죽어야 하고, 어른은 실속없는 철부지가 되어야 하고, 개는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는 입장에 서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대안도 없다. 새우는 싸웠으면 끝이지 고래가 등이 터지건 말건 알바가 아니다. 어른이 싸웠든지 말았든지 아이들은 다음 날로다가 친구하고 논다. 분통 터지는 것은 어른 사정이지 애가 알바가 아니다. 닭도 마찬가지다. 개새끼가 주인한테 빚자루로 맞든지 몽둥이로 맞든지 꼬끼오 노래나 부르면 된다. 세상에는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다고 하지만 이런 일처럼 딱하고 한심한 지경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런 속담들을 만들어 그 입장을 위로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그동안 무거운 가슴의 소란을 묵상으로 적고 싶지 않았으나...... 내일이면 주님께서 이런 내 가슴의 소란들을 대신하여 죽으신다고 하시니 남아있는 못을 마저 박는다. 탕탕탕!

 

<주님! 제 발 뿐만 아니라 제 죄까지도 깨끗이 씻어 주시옵소서. 아멘!>

 

ㅡ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씼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에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 넘길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슴 하신 것이다. 요한13,10-1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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