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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17) 누구를 통해서 회복(回復)의 역사(歷史)를 하시는가? (창세8장13-22)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14 조회수352 추천수3 반대(0) 신고

 

현대판 노아의 방주

창세기(17) 2023. 4. 14.

 

누구를 통해서 회복(回復)의 역사(歷史)를 하시는가?

 

(창세813-22)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

15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셨다. 16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와라. 17 모든 생물들,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살덩어리들, 곧 새와 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을 데리고 나와라. 그래서 그것들이 땅에 우글거리며 번식하고 번성하게 하여라.”

18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19 모든 짐승과 기어 다니는 모든 것, 모든 새와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도 종류별로 방주에서 나왔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 노아 때의 세상을 심판하셨던 목적은 절대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회복을 위해서 심판하셨습니다.

회복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시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황폐하여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이 노아홍수로 폐허가 된 세상과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진정한 회복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며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지금도 마음에 기억하고 계심을 믿읍시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의 바람을 불어주심으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 성령하느님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갈 때 먼저 하느님의 진노가 그칩니다. 또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갈 때 모든 것이 다 자기 위치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있을 곳은 서로 판단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염려하고 걱정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을 곳은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따라서 우리가 있을 기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역사는 긴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의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고통가운데서 참고 견뎌야합니다. 도망가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고통가운데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의 올리브나무 새 잎사귀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작은 올리브나무 새 잎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작은 올리브나무 새 잎을 가지고 이제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립시다.

혹 우리에게 그 어떤 인간적인 올리브나무 새 잎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저는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나무 새 잎을 보면 올리브산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와 땀을 흘리시고 기도하신 예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어떤 올리브나무 잎이 보이지 않아도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희망의 올리브나무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라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회복을 희망하며 기다립시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옛 자아가 죽은 자를 통해서 하느님은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1베드3:20-21)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 홍수때 물은 너희를 구원하는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린도전서 101절과 2절에서도 이스라엘백성들이 홍해를 지나간 것을 세례를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방주에 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물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 홍수 때의 물은 세례 때의 물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때의 물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물에서 나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내가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어떻게 코로나로 폐허가 된 이 세상이 새롭게 회복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세상은 바뀔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 세상은 바뀔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과연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이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6,5-6)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9,21) .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홍수의 심판 있어도 사람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바뀔 수 있고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죽어야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죽어야합니까? 우리의 옛 자아(自我)가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죽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물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는 분명 세례를 받을 때 물에 잠기는 예식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었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시에 물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6:3-4)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새롭게 깨달아야할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단순히 우리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의 물속에서 나온 것이 세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속에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폐허가 된 이 세상이 어떻게 회복이 될 수 있습니까?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축복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진정으로 믿어야합니다. 더 이상 나의 옛 자아로 살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이미 되었음을 믿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 모두에게 코로나의 시련을 주십니까? 끝날 것 같은데 왜 끝나지 않는 고난들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은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정말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었음을 믿으십니까? 내가 죽었다면 누가 나에게 무엇이라 하든지 상관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하니 내가 죽었음을 완전히 믿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는 예수님과 죽었습니다.

나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은 물고기는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아프지 않습니다.

회복된 세상을 원하십니까?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혀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 있을 때 우리가운데 진정한 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이제 홍수가 끝이 났습니다. 비만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물이 다 말랐습니다. 물만 마른 것이 아니라 땅도 다 말랐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장 방주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이 마르고 땅이 말라도 방주에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면 방주가 인간적으로 살기 좋은 곳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가 다른 동물에게 먹이를 주니까 사자가 화가 나서 노아를 발로 쳐서 노아가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방주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느님께서 아직 그에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는데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7,1)

 

(창세8,13-16)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 15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셨다. 16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와라.

 

일 년 내내 힘든 홍수 기간을 견뎠고 이제야 홍수가 멈추고 새 생명이 비치게 되었는데,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고는 무덤 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이의 용기를 보라고 했습니다. 방주는 인간적으로 보면 빨리 나오고 싶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용기를 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가라하는데 가고 성경에 서라 하는데 서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성경에서 하지 말라 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내가 아무리 하기 싫어도 성경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성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 하느님은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야고1:22-25)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왜 말씀을 듣기만 하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까? 우리가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도 기도하는 자인 것처럼 자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

왜 우리들은 들었던 말씀을 잊어버리십니까? 그 이유는 그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그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왜 말씀을 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도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왜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율법 또는 말씀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면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면 그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또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말씀에 따른 복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도 노아와 같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무덤과 같은 곳이라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용기를 가지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무엇이라도 순종함으로 달려갈 수 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세째. 하느님은 예배하는 자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코로나가 완전히 물러가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야훼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창세8,20)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성경에서 제단을 쌓고, 주님께 번제물를 드린 사람은 노아가 최초입니다. 카인과 아벨은 제사를 드렸지 제단을 쌓거나 번제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노아가 왜 제일 먼저 집을 짓지 않고 살 터전을 만들지 않고 주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까? 먼저 그 이유는 노아는 방주에서도 야훼께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예배가 아니면 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코로나 이후에 하느님께서는 코로나의 상황가운데서 끝까지 예배의 자리를 지킨 사람들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에게도 회복의 역사를 주실 것입니다. 어려운 코로나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예배의 자리를 지키신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노아는 자신과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오게 된 것은 오직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인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노아가 제사를 드린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기 위함입니다. 20절에서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의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레위1,4) 4 번제물의 머리에 손(동일시, 전가)을 얹는다. 그러면 그 제물이 그(제사 드리는 자)를 위해 호의로 받아들여져, 그의 속죄가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노아는 제사를 드릴 때 자신의 모든 죄를 제물에게 전가(傳家)를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의 모든 죄를 정결한 제물에게 전가를 시켰습니다. 그랬을 때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제란 죄를 사()해 준다는 것입니다.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제사를 드릴 때 하느님 홍수가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악합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우리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주옵소서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세8,21)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여기서 주님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고 하는데, 이 향기가 어떤 향기이겠습니까? 단순히 제물의 향기이겠습니까? 사실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을 태우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보면 역겨운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향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 자체의 향기 보다 번제를 드리는 노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하느님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음으로 악한 냄새를 뿜어냈다면 노아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아름다운향기를 드러냈습니다. 또 노아는 감사의 제사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또 노아는 제사를 드릴 때 모든 사람을 용서함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무엇보다 노아는 제물에 안수함으로 노아 그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다시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향기 나는 예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이 예배(미사)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음을 고백하는 사람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예배에 감사하는 자를 통하여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예배시간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죽음과 순종과 감사와 용서의 향기를 받으시고,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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