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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위대한 만남)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23 조회수1,313 추천수0 반대(0) 신고

 



위대한 만남

+찬미예수님

한 주일 동안 별 일 없으셨지요?

이제 한 해 며칠 안 남았네요.

성탄절도 내주 화요일입니다.

독서한 형제님, 아들 신학생이

아버지, 인생이 뭐에요?”

하면 뭐라 답해주실 겁니까?

대중가요에서,

돌아가신 최희준씨의 히트곡,

하숙생그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아 이 노래는 심오해요.

나이가 다시 그 노래를 씹어볼수록

복음 전체가 요약이 되어 있어요.

인생에 대한 각자의 답이 있겠지만

최희준씨는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100프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정말 가슴에 와 닿아요.

우리는 모두 다 나그네죠.

그 나그네 길 가운데

수많은 만남이 있어요.

그래서 인생은 한마디로

만남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인생은 만남이고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우리는 안 만나고 살 수 없어요.

아침에 눈 떠서 물건이든,

인간이든, 짐승이든

계속 만나야 돼요.

이 만남이라고 하는 무대가

늘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하느냐?

그렇지는 않죠.

모든 만남이 내게 꽃길 같고

행복하고 기쁨만 주는 만남이라면

인생은 정말 쉽겠죠.

그 만남의 무대에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죠.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진리와 만날 때가 있으면

거짓과 맞서야 될 때가 있고,

또 신의와 만날 때가 있으면

배신을 당할 때도 있고.

행복할 때가 있으면

불행이 엇갈리는,

어찌 보면 이 만남이라고

무대는 끊임없이

싸우는 대결의 장입니다.

성서를 살펴보면,

카인과 아벨은 형제였지만 이 만남은

질투와 살해의 만남이었습니다.

인류 최초 인간의 만남은 뭔가

어둠을 깔고 시작이 된 것 같아요.

훌쩍 건너뛰어서 예수님과

유다스의 만남은 배반과

가책의 만남이었어요.

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은 진리를 사랑하는 깊은

내면적인 만남이었죠.

거대한 두 별이 부딪칠 때마다

기가 막힌 진리가 만들어졌어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암브로시오 주교와의 만남은

회개의 만남이었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나기 전까지는

개망나니였습니다.

마니교에 빠져서 누구보다도

머리는 천재였지만 세상에서

제일 잘난 척했죠.

당시 최고의 대설교가인

암브로시오 주교가 온다하니,

가 보자. 잘 해야 얼마나 잘 해?’

맨 뒤에서 들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하느님을 찾게 된 만남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의

만남은 기울어져 가는 중세교회를

재건하는 계기가 되는

거룩한 만남이었습니다.

단종과 성삼문의 만남은

신과 의를 잇는 불멸의 충성을

빛나게 하는 만남이었고,

공자와 안연의 만남은 유교를

창립하게 했던 만남이요,

석가모니와 아난의 만남의

불교의 기본교리를 정립시키는

특별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구원기관인 교회를 탄생시키는

기초가 됐던 만남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수많은

만남 가운데 이렇게 별처럼

빛나는 만남이 있고

카인과 아벨처럼

어두운 만남도 있습니다.

김웅렬 신부와 서운동 신자들의

만남은 과연 행복한 만남일까,

불행한 만남일까?

오늘 복음에 두 여인이 만나죠.

세례자 요한을 태중에 모신

엘리사벳과 예수님을 태중에

모신 성모 마리아의 만남.

역사 이래 여자끼리 만남 중에

이렇게 거룩하고 흥분되는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없습니다.

인간이 선하게 변하느냐,

악하게 변하느냐는 것은

만남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 하는

자매들의 만남은 늘 회개와

감사의 분위기가 휩쌀 겁니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절대로 남을 흉볼 수도 없고,

늘 선한 쪽으로 바뀝니다.

하나하나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하지만 돈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계모임의 만남은 자칫 잘못하면

시기와 질투, 허세 등으로

인간적인 재미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적인 평화,

기쁨과는 거리가 멉니다.

동의하십니까?

나는 계모임을 갈 때가

성당 모임을 갈 때보다

더 은혜를 받아.

우리 계는 은총 충만해

그런 계 있으면 저 좀

가입시켜 주십시오.

아무튼 이런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만남이든지

만남의 결과는 분명히

큰 영향을 줍니다.

선한 만남이 있고

악한 만남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에서 위대한

만남을 갖습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거리를 줍니다.

첫 번째로 이 만남이

거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이 거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남의 원칙이 나옵니다.

만남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말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만나자마자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만남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만나자마자 음란한 말로 시작해서

농담으로 끝나는 모임이 어떻게

거룩한 모임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남의 질(quality)는 언어의

내용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는 자주 말에 대하여

회개해야 됩니다.

올해 일 년 동안 형제자매들에게

거짓말 하거나

상처 주었던 적은 없었던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내뱉었던 적은 없었던가?

근거도 없이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한 적은 없었던가?

어떤 만남이든지 만남은

신비스럽고 귀한 것이지만,

나중에 나의 경솔함과

악한 마음 등으로

그 만남이 추하고 냄새나는

만남으로 변할 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만남이 거룩해지려면

첫 번째 단추는 주고받는 말이
거룩해야 됩니다. 아멘.

두 번째로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나이로 볼 때 위였지만

마리아에게 찬사를 드립니다.

그 찬사는 마리아에게가 아니라,

태중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마리아는 찬사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움직이는 감실인

우리는 당연히 존경을

받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내가 가족에게서,

내 자식에게서,

세상에서 존경받는 존재인가?

만일 존경을 받고 있지 못한다면,

내 쪽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성체를 모시고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는 하루에 몇 번

성체를 영한들,

한 번도 주일을 궐하지 않았다한들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세 번째로 두 여인의

만남이 거룩한 것은 엘리사벳의

지극한 겸손입니다.

교만한 인간들끼리 만난 모임은

늘 치고받습니다.

자기주장만 옳다고 합니다.

너 잘났다 나 못났다

해야 하는데 너 못났다 나 잘났다

만 항상 얘기합니다.

엘리사벳의 지극한 겸손!

나이로 보나 족보로 보나

딸 같은 여동생이었지만,

얼마나 신중하게 예의를 갖춥니까?

마치 이 모습은 나중에

그 태중에 든 두 아들들의

요르단 강에서의 만남 같습니다.

형인 세례자 요한이동생인

예수님에게

나는 저 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

고 겸손 밑바닥까지 내려갔듯이

엘리사벳도 되는 마리아에게

지극한 겸손을 보입니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던 겁니다.

태교는 그만큼

자식들에게 중요합니다.

미움과 분노 중에서

아기를 갖고 있다면 태어나는

아기는 대부분 난폭하고 거칩니다.

교만한 부모 밑에

교만한 자식이 나오고,

욕심 많은 부모 밑에서

탐욕스러운 자식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뱃속에서 엄마기도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태어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렇게 하지는 않더라도,

어찌 험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제일 먼저 태중에서 배운 소리가

기도소리, 엄마의 기도소리.

세례자 요한은 저절로 생긴

인간이 아니죠?

그 어머니가 계셨기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예수님의 앞길을 닦는 분이

나온 겁니다.

교육학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의 인물을 만들려면

3대에 거쳐서 노력해야 된다.’

내 집안에서 나라를 빛내고

교회를 빛내고 인류를 빛낼

정말 괜찮은 인물 하나를 만들려면

3대에 걸쳐서 노력을 해야 된다.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될 겁니다.

오늘 두 여인의 만남처럼

우리 신자들의 만남도

거룩하고 복된 만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8년 대림 제4주일(12/23)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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