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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주간 화요일제1독서 '참 형상' (히브리서10: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28 조회수1,341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3주간 화요일제1독서에서~~~~

참 형상

히브리서10:1-7

1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뿐이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해마다 계속해서 같은 희생제물을 드려도 그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2 만일 그렇게 해서 완전해질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사람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다시는 죄의식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계속해서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3 그런데 해마다 제물을 바치면서 죄를 되새겨야 하는 것은 4 황소와 염소의 피로써는 죄를 없앨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6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모형으로서의 율법과 원형으로서의 하느님 묵시를 계속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라' 그러죠. 그림자고 '참 형상이 아니다' 그래요 그러면서 '해마다 드리는 그런 율법의 제사로는 온전하게 하느님 앞에 나 갈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뭐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거라 그랬죠? 죄를 깨닫게 하는 거다 그러죠. 그런데 '죄를 깨닫게 하는거다' 라는 게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진짜 죽은 자가 맞네' 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가는 거란 말이죠.

'진짜 죽은 자가 맞네' 라는 걸 알고 오라 그랬더니 거기에서 그 율법을 가지고 '나는 산 자예요' 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성화론' 이죠. 그래서 그 '聖化' 에 목매다는 사람들은 늘 두렵고 하느님나라가 오는 것을 공포스러워 합니다. 왜냐면 자기는 자기 스스로를 알기 때문에 이 정도 갖고는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나라를 기다릴 수가 없죠. 그래서 늘 자기의 모습에 이렇게 불안해하고 불쾌해하고 그런 거죠. 그런데 하느님은 이 땅의 것 역사 속의 것을 안 받으세요. '한 몸' 을 하느님이 예비하시죠. 하느님이 제물을 예비하시고 하느님이 제사를 제정하시지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율법에 의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은 하느님이 안 받는다 그러잖아요 그죠?

 

율법, 옛 언약을 설명하는 구약에서도 하느님이 수시로 말씀하시죠. '내가 무슨 기름타는 냄새가 구수해서 너희들에게 제사 지내라 그런 줄 아냐? 살진 희생의 소에 질렸고 내가 짐승의 고기에 질렸다' 그런다 말이죠. 역사 속에서 우리가 드리는 것은 하느님이 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건 다 무엇을 다 모형하고 있는 거와 같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한 몸을 예비한 거 '예비하다' 그것을 '야훼 이레' 라 그러죠. 그게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아브라함의 모리아산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야훼 이레가 한번 나오는데 야훼 이레가 뭐에요? 아브라함이 이제 이삭을 하느님께 받치면서 거기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 교회니까 아브라함 교회가 아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을 우선 모형으로 보여주고 또 한 가지 측면은 뭐냐면 아브라함은 아들까지 받치려고 하는 이 인간의 행위를 끝까지 안 받는다 를 또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확 죽이고 난 다음에 자기가 얼마나 또 자랑스러웠겠어요. 그러니까 그 순간에 딱 멈추게 하고 아버지가 하느님이 예비하신 양을 하나 준비 해놓고 '저거다' 라고 이야기 하죠 . 그것이 이제 출애굽기에서는 희생당한 어린양으로 나오는 거고 (피가 발려진) 그리고 그 '' 는 또다시 신약에서 예수님의 새 언약을 모형하는 보여주는그 '예수의 피'로 이렇게 이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자기 아들의 피를 받고 다른 이들의 피를 아버지는 안보는, 더러운 그 피를 왜 보냐고요 아들만 보는 거죠.

 

항상 장자 첫째가 와서 장자가 모형으로 장자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원래 장자가 언약의 축복을 받아야하는 자잖아요) 이 사람이 부정돼요. 삭제되고 항상 차자가 그 뒤를 들어가죠. 성경에 보면. 아담을 첫째 아담이라 그러죠. 성경이 장자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둘째 아담이에요. 마지막 아담. 차자 그러니까 장자가 모형으로 뭔가를 보여주고 차자가 그 장자의 것을 그냥 입어 그냥 하느님나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에사오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자의 축복을 에사오가 다 받을만한 자격을 다 갖추죠.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는 그거 안 받고 이 자격 없는 차자, 비리비리한 차자에 그 염소의 털을 덮어서 그 염소털이 뭐에요? 창세기에 나오는 짐승의 가죽옷이란 말이에요. 그 비리비리한 야곱이라는 이름도 야곱 강도잖아요. 도적이란 말이에요.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와 같은 단어에요. 70인 역에 보면 야곱이라는 그런 놈에게 가죽 옷을 아버지가 만들어 입혀서 이게 장자다 '아버지 저 에사오에요' 그러고 들어가죠. 야곱이 '아버지 나 예수예요'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가 아버지의 장자죠.

그런데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또 장자라 그래요. 그런데 어떤 장자냐고요? 그게 아버지 나 에사오에요 하고 예수의 피 에서의 염소 털가죽 옷 그거 입고 아버지한테 예수의 옷을 내미는 거지 내가 아버지가 맛있는 음식을 내가 만들어서 가지고 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야곱이 가지고 간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별미는 야곱이 만든 게 아니라 예수를 상징하는 엄마가 만들어서 준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걸 감사히 받아가지고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 이거 민망하지만 내가 아버지 이거 기쁜 거라는거 알고 가져 왔는데 사실 내가 만든 거 아닌데요. 그런데 이걸 저한테 갖다 주라고 주네요 아버지 기쁘세요? 하고 갖고 가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런데 인간들이 그걸 못 믿으니까 자꾸 역사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예요.

 

유사 이래로 모든 인간이 에사오처럼 그 길을 간단 말이에요. 열심히 나가서 이 광야인생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왜 광야를 걸었는지 아세요? 그게 우리 역사를 모형 한 거라 그랬잖아요. 광야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곳이에요. 거기는 풀도 없어서 목축도 못한다니까요. 거기서는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 하늘 빵, 만나만 먹어야 돼는 곳이란 말이에요. 이게 역사라니까요.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는 일을 하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무슨 전부 서원을 하고 사명을 받았다고 그러고 뭘 땅 끝까지 뭘 한다고 그러냐고요. 땅 끝이 어디냐고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걷다 걷다보면 나한테로 오는 거예요. 여기가 땅 끝이라고요. 어딜 간다는 거예요? 도대체..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건데..자꾸 어디 아프리카에 가고..이따위 소리나 하구 있어.

 

성경에 보면 우리보고 질그릇이라 그러죠. 질그릇은 뭐에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질그릇은 진흙을 빚어 만든 그냥 허드레 것 담는 그릇이에요.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 질그릇은.히브리 사람들이 1차 수신자니까 그 사람들이 이해하는 그 이해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이죠. 진흙.. Dust 로 만들어진 그냥 무얼 담는 거예요. 화채 그릇 그러면 화채가 중심이지 그릇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밥 그릇 그러면 밥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밥그릇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성경이 자꾸 우리보고 질그릇이라 하냐고요.

사람들은 이 '그릇' 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자꾸 어떤 작품을 만들어서 박물관에 두려고 그래요. '상감청자' 이런 거 '꿀 담는 그릇' 이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만지지도 못하게 전자장치를 이렇게 해놓아 가지고 가까이 가면 도둑놈 취급하죠. 얼마나 비싼지 몰라요..그거에요 우리는 이렇게 감상하고 멋진 것이 되어서 누가 이렇게 야..참 멋있다 괜찮다 감상할 수 있는 도자기로 지어진 게 아니라 그건 골동품이잖아요. 원래 기능이 뭐냐면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다고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고가야 되는게 뭐냐면 나는 언제든지 깨지면서 그리고 언제든지 이렇게 질그릇으로 폭로되면서 내 안에 예수가 담기지 않으면 그냥 질그릇이구나를 보이고 가는 거지 내가 도자기가 되어서 자꾸 진열대에 올라가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성화는 보면 전부 자기가 도자기가 되어서 진열대에 올라가려고 하는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항상 남을 정죄하고 항상 너는 왜 그렇게 밖에 못살아 라고 지적하는데 쓴다 말이에요 성화를 해놓고. 성화도 아니지만 그런 거는 늘 불안한 거예요 .

 

시골에 가면 바가지 있죠 표주박. 그 바가지는 깨지면 이렇게 실로 꿰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거는 꿰매도 물이 안새요 그죠? 그러면 그걸로 물을 떠먹어요. 그런데 이천에 도자기 공방 같은데 가보세요. 도자기를 천 개 만들면 반 이상을 이렇게 보다가 흠이라도 요만큼 있으면 망치로 다 깨버립니다. 관상용으로 만들어지는 건 흠이 있으면 깨져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사고가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불안한 거예요 왜 나에게 이렇게 흠이 있어. 바가지 (부제 : 지금 변하지 않으면)

그런데 내가 예수를 담는 그릇이라는 의식이 있는 사람은 꿰매면 좀 어떻고 흠 좀 있으면 어때 깨지면 좀 어때 도 좀 꿰매면 되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내 안에 담겨지는 예수' 그 내 안에 '담겨진 예수' '' 라는 그릇을 통해 예수가 일을 하는 걸 하느님께 쓰임 받는다고 하는 거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 라고 하는 거지 지 힘으로 지 도움으로 지 시간을 들여서 땅 끝까지 뛰는 건 이건 마귀새끼가 하는 짓이란 말이에요 . 마귀가 그런 거 아니에요? '..니들 힘으로 좀 해봐 선악과..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얼마나 멋있니 인간의 자존심 한번 좀 지켜라 세워라' 이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가 질그릇이라는 거, 바가지라는 거를 모르고 예수를 담는 그릇 이라는 걸 모르고 자꾸 진열대 위에 도자기들을 부러워하면서.. 그건 흠이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우리보고 '질그릇'이 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 무얼 담든 그건 土器쟁이가 할 거니까 요강으로 쓰던 꿀단지로 쓰던 보석함으로 쓰던 그거는 토기쟁이에게 맡겨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너는 이 땅에서 개차반으로 살면서 개망신 당하다 와 그래도, 그러고 저런 이도 어떻게 하느님이 구원하시냐 그 역할을 맡아라 그러면 평생 그렇게 가야되는 거예요. 요강으로 쓰이다 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니까 참 저렇게 삶에서 향기가 나는구나 그걸 교훈하기 위해 너는 그러면 그렇게 살다 와라 그러면 그렇게 가는 거예요. 그건 그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담은 그 예수라는 그 진짜 내용물 진짜 주체에 의해 나오는 반응들이기 때문에 그걸 자체로 정죄가 되거나 상을 받는 근거가 못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그릇 된 나' 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왜 난 이렇게 살아야 돼~왜 저 사람은 저렇게 늘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이러는 거예요.

하느님이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에 이른 자 아니다 그래요 . 그 두려움이 뭐겠냐고요. 내가 내 꼬라지를 보고 스스로 자기를 뭐 야 이거 이래서 어떻게 아니 야곱이 그 뻔뻔함을 보세요 야곱은 아버지가 맛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냥 실력도 없었고 요리 실력도 없었고 장자의 그 풍채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들어가서 내가 에사오에요 내가 장자에요 내가 예수에요 라고 얘기한 바로 그거예요.

  아버지가 이거 음성은 야곱인데 라고 이야기를 성경이 굳이 그 이야기를 거기다 끼워 넣겠어요 음성이라는 건 변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고 하는 거거든요 분명히 알게 돼 있다고요. 이거 내 아들 에사오 목소리가 아닌데 목소리는 야곱인데 그러고 아버지가 야곱에게 그 강도에게 장자의 축복을 준다고요. 그 예수 믿고 가는 거예요

내가 너무 이 세상 속에서 내가 보기에도 참 잘 살잖아요 그러면 왕이 은혜로 베푸는 그 잔치에 절대 안가요. 바리사인들에게 그런 비유 주시죠.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다 초청을 했는데 아무도 안와. 거기에 은혜가 부어지는 잔치자리인데 왜냐면 내가 보기에도 내가 지금 의로운데 뭐하러 은혜가 베풀어지는 잔치 자리에 가겠느냐고요. 그 때 왕이 뭐라 그래요? 가서 '저는 자 병신 도대체 거기에 대해서 갚을 것이 없는 그런 자들 데리고 와라'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오더라는 거예요. 은혜 받아야 되니까.

 

왜 예수님이 세리와 창녀들을 함께 이렇게 친구로 삼아, 왜 그들과 시간을 그렇게 보내셨겠어요? 우리 인간이 나 라는 걸 규정 할 땐 항상 내 밖에 있는 대상의 평가나 반응 그리고 그것과의 관계에 의해 나를 규정한다 그랬죠. 왜냐면 그런 게 없으면 인간들은 '' 라는 것을 규정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요. 하다못해 태어나자마자 '난 엄마의 아들' 이라는 '' 가 이제 점점 규정이 되는 거잖아요 '동생의 형' '직장의 상사' 이렇게..그런데 그 '' 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그 외부의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엉터리 나' 를 끊임없이 붙들게 되는 거예요

원래 인간의 나 라는 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 '' 여야 되는데 세리와 창녀를 보세요. 밖에서 그들을 규정하고 있는 그들이 자랑할 만한 '' 가없어요 언제든지 하느님이 끊어내도 괜찮은 거예요.

그 때 그 죄인들에게 하느님이 가셔서 그거 세리, 창녀에게 내가 너를 간음한 여자라고 고소하지 않는데 누가 너를 고소하니? 네 주위에 봐라 누가 남아 있냐? 물어보잖아요 '내가 너를 고소하지 않을 때 사람들이 너를 죄인이라 할 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거예요 간음한 여자한테.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주는 예수 그 분을 찬송하고 그 분을 사랑하기 위해선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데 이걸 건너 뛰어버리고 어줍지 않은 어플리케이션 적용들을 이야기를 해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사는 겁니다 저렇게 사는 겁니다 를 해놔 가지고 그냥 자기들이 하는 연극이나 쇼 이런 거에 본인들이 기특해서,

왜냐하면 하느님은 완전한 걸 요구하신다고 하는데 뭐 뉴스를 보던 내 이웃을 보던 나만큼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꾸 안심을 한다니까요 사람들이, 그래도 이 정도면 살아 있는 교회지 뭐 이 정도면 부유한 교회지 이게 라오디게아교회 사르디스교회였잖아요 '너희들이 부유하다고? 너희들이 진짜 가난한 거야. 너희들이 살았다고? 너희들이 죽은 거야' 하느님이 그랬잖아요. 그들의 행위로 그들은 자기들이 부유하다 그랬고 우리는 살았다 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하느님이 아무리 초청해도 안 올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내가 왜 은혜를 받으러 가야돼 나도 지금 바빠 훌륭한 나를 구축하기 위해 지금 바빠 죽겠는데 어디 그런 잔치에 가서 히히덕거릴 시간이 있어. 오늘 날 오해되고 있는 그리스도교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눈치 채는 사람이 없어요.


107절에 보면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이게 하느님의 뜻이 우리가 에베소서 1장에서 본 '창세 전 언약' 이에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내 백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피 뿌리러 오신 분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도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점이나 흠이 있으면 어떻게 한다 그랬죠? 나를 깨버리고 싶다고요. 자기가 벌을 준다니까요 자기에게. 그걸 두려움이라 그래요 그걸 공포라고 한다고요.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그 피를 갖고 오신 그 분이 오셔서 우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만들었다는데 왜 자꾸 우리의 점과 흠을 보고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 하냐고요. 그러니까 뭐 전부 연극들 하는 거예요

어디에 악마가 진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으세요? 이건 그냥 '모든 인간들의 모습' 이에요 인간들은 자기의 유익 앞에선 이런 거 이 정도 아닙니다.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보시라고요. 사회법과 도덕과 윤리가 제재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명씩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사람을..

그런데 이 원수들이 이게 지옥의 도가니의 세상의 실체인지 알지 못하고 이 놈들을 빨리 벌주어서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한번 증명해보고 이 세상은 얼마든지 인간들이 원인을 제거해서 올바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이게 이게 마귀에요. 이게 율법주의 인본주의의 세상이란 말이에요.

 

우리들도 어제까지는 그 사람들의 편이었잖아요?. 그런 마귀 같은 새끼들은 빨리 감옥에 쳐 넣어가지고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만들어야 된다...마귀가 얼마나 머리가 좋아요. 모든 인간들을 정의의 사도로 만들어서 예수그리스도가 만들어 놓은 그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자꾸 이 세상에서의 '정의로운 사회 행복한 나라' 이런 것들을 꿈꾸게 만들어 준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시라고요.

뭐이 우리 안에서 무슨 사랑이 많다고 사랑을 해야 된다고 그랬다고 그러던데.. 아니 요한 14장에 그 사랑 이이야기는 분명히 전제 단서가 있잖아요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니' 그러면 그 사랑은 누구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하느님만 할 수 있다는거에요. 그러면 너희들에게 사랑하라 는 말은 무슨 말 이겠냐고요. 요한이 그 말을 전제로 달아 놓고 너희들끼리 사랑하라 라는건 사랑 할 수 없는 자들이 붙들 수 있는 게 뭐에요? 예수 밖에 없잖아요. 서로의 마음 속에서 그 예수가 들어 갈 때 그 예수는 내가 사랑하는 거잖아요 그 예수가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됐을 때 우리는 사랑 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그 예수를 사랑하는 거라고요. 그래서 사랑은 하느님께 속한 것인데 너희들 안에 예수가 있을 때 그 예수를 사랑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같은 책에 나오잖아요. '법 율법 지켜라 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니'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무슨 이건 전체적인 맥락이나 문맥도 모르고 무조건 하나 뚝 뛰어서 사랑해라 그러면 그건..결국은. 그 사랑해서 내가 나 사랑했다 라는 것 때문에 행복해지고 기쁘니까 하는 거지, 나에게 어떤 보상이나 나에게 어떤 평가나 이런 것들이 없으면 사람들 그런 거 못해요. 그런데 그런 걸 그냥 '사랑' 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냥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덮석 받아먹는 거예요 그래야 아버지가 기뻐요. 그리고 혹시 실수하고 잘못한 거? 우리 아버지 엄마가 이렇게 닦아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애기 때 한두 살 먹은 애가 기저귀에다 똥 쌌다고 아니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냐고 애를 두들겨 패는 거 보셨어요? 그거 갈아주면서도 예쁘잖아요 매번 색깔까지 확인하잖아요 사랑스러우니까. 내 새끼니까.

아니 애가 엄마가 기저귀 가는 데 괜히 막 계면적어 하면서 미안해요  내가 아직 어려서 이렇게 오줌도 싸고 그러네요  어머니 조그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금방 성숙해서~~ 그러면 애 키울 맛이 나겠느냐고요. 애가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에서 떠나요? 품안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할 때, 그리고 지일을 지가 이제 할 테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때까지 그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 붓던 엄마들이 패닉상태에 빠진다니까요 그럼 난 이제 뭐해?....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가 그냥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그래서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게 그게 애기거든요. 애기는 아빠가 다 해줘야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오해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진짜 자기가 믿은 예수가 내가 사랑스럽잖아요 내 안에 있는 그 예수가 어떻게 이런 나를 사랑했을까? 라고, 그 예수가 사랑스러우면 그 예수를 품고 있는 상대방이 궁금해지고 사랑스럽게 돼 있다고요 왜냐면 내 주위에 없잖아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구역모임 가 보세요 서로 다 딴 얘기하죠? 전부 엉뚱한 얘기하고 있어 열 명이면 열 명이 딴 얘기하네 그러니 거기 가서도 외롭잖아요 아니에요? 외롭게 하는 분들인가요?

   

우린 그냥 하느님을 담는 바가지예요 질그릇이라고요. 도자기 되려고 하지 마세요. 진열대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하느님이 이 세상 속에서 깨진 바가지로 쓰신다면 그렇게 쓰임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귀하게 쓸 그릇도 만들고 천하게 쓸 그릇도 만들었다' 그러면 금방 인본주의자들 그러죠? 아니 누구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누구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고.. 이게 뭐냐고. 바울이 그러잖아요 그릇 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깨진 그릇도 있다 그게 다 그릇이에요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란 말이예요 그게..

 

그러니까 그런 거에 내가 담는 그 보배가 소중하다는 걸 알면 내가 어떤 그릇으로 지금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서 자꾸 이제 놓아 질수 있다고요. 진짜 복음을 알면 그것조차도 감사하게 된다니까요.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하느님이 그 상황에 담겨 당신의 백성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잘 들으면 되는 거예요. 아 나는 왜 깨졌어.. 나는 왜 꿰맸어.. 이렇게 나는 왜 낡은 바가지야... 이렇게 된다고요. 그런데 거기에 맑은 생수가 담기게 되면 이게 생수 바가지라고요 그걸로 보물을 푸면 보물 바가지라고. 자꾸 이 바가지를 어떻게 하면 보석으로 만들까 에 관심이 있다고요 아니 그렇게 쓰임을 받는 걸 보석이라 그래요

보석이 뭐냐고요? 암석이 흙이 강력한 충격이나 확 불에 의해서 홀랑 탄 게 보석이란 말이에요. 흙이 죽은 흙인 聖徒가 하느님의 고난의 시간을 통과 할 때 보석이 되는 거지 여러분이 성화해서 보석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 인간들이 추구하는 보석은 천국의 도로포장 재료밖에 안 돼요. 거기는 길이 다 금이라 며요 왜 그런 도로포장 재료 같은데 될라 그러냐고요. 하느님을 담으세요. 그 예수를 믿으라니까요. 예수를 붙드시라고요. 그래야 사는 거예요.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면서요? 예수 밖에는 생명 없단 얘기에요.

 

사랑합니다.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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