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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부님 강론 머리 쥐어짜서 복기한 강론( 한 자매님께 보내드리고 싶어서 )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2 조회수1,351 추천수0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제가 작년 대림시기에 카톡으로 저는 마산교구 신자이고 작년 가을에 유섬이님 도보순례 때 같이 도보순례한 전주교구 자매님과 카톡을 주고받았습니다. 서로 그냥 인사를 하면서요. 사실 저는 유섬이 도보순례 때 제가 이 자매님의 응원 덕분에 300km를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첫날부터 후미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화 주제는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신 이야기를 주런주런 이야기를 하면서 도보순례를 하며 아무튼 배울 점이 많은 자매님이었습니다.


도보 순례가 끝나고 나서도 몇 번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전주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하실 정도로 정말 저를 너무나도 동생처럼 잘 챙겨주셨습니다. 그렇게 이따금씩 소식을 전하다가 하루는 카톡으로 나눈 대화가 주일 저녁이었을 겁니다. 제가 간단하게 답변하고 그냥 서로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월요일에 저희 본당은 월요일만 새벽미사가 있습니다. 새벽미사를 참례했는데 저희 본당에 잠시 안식년 하시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날 새벽미사 때  그 신부님께서 주례를 하셨습니다. 미사 강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요 그전날 전주에 계신 자매님과 카톡으로 주고 받은 내용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줄 수 있는 강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께 인사를 하고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사실 이러고 저러고 해서 오늘 신부님 강론 원고를 어느 분에게 좀 꼭 전달하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죄송하지만 강론 원고를 좀 받을 수 있는지요 하니 신부님께서 사색을 하시면서 형제님 정말 죄송한데 저는 지금까지 남에게 제 강론원고를 줄 만큼 자신이 없다고 하시면서 극구 사양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제가 쪼를 수도 없고 해서 네 잘 알겠습니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자매님께 다시 카톡으로 알려드리면서 아쉬움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면 자매님 제가 얼마나 신부님 강론을 복기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내용을 한번 복기해서 보내드릴까요 하고 말씀드리니 자매님께서 베드로씨 그럼 나도 그 신부님 강론 궁금하니까 한번 머리 쥐어짜서 보내줘봐요 이렇게 말씀하셔서 제가 정말 머리를 쥐어짜서 새벽에 신부님 강론하신 걸 최대한 복기를 해서 자매님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때 자매님께 보내드린 신부님의 강론 내용입니다. 그 자매님이 아니더라도 강론이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보시고 은혜 받으셨으면 합니다.


다음 글 전부가 제가 자매님께 카톡으로 보내드린 글 전문입니다.



이제 전례력으로는 대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또한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이렇게 새벽에 미사에 참례하려고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은총이 내리시길 빕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생활을 하여도 눈뜬 장님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저는 수없이 많이 봤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최소한 눈 뜬 장님은 아니겠죠. (웃음) 신부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이른 시간에 미사에 참례하신 분들에게 힘을 주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우리 몸은 천냥이라면 눈은 몇냥이라고들 하죠? 네, 구백냥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눈이 몸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큽니다. 눈의 기능은 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될 게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육안은 그냥 뜨고 있으면 있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바로 신앙의 눈, 영적인 눈, 영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어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어떤 사람은 감동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덤덤한 반응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바라볼 수 없는 면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 있어서 감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본질을 보고 바라보는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 그걸 해석해 받아들이는 방식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이 다가오면 구유를 만듭니다. 육적인 눈으로 보면 구유 속에 뉘어져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총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기는 십자가와 고통도 제대로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이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엄청난 축복임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영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바로 그건 하나의 고통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눈이 뜨일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영안이 열려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서 주님을 맞이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는 전례력으로는 새해를 시작하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각오로 믿음생활을 하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하나씩은 마음속에 간직하시면서 이번 성탄 때까지 그걸 주님께 봉헌하시는 것도 의미 있는 대림시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최대한 제가 기억을 재생했습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미세한 부분은 이해는 했지만 전달하려고 하는 부분이 어려워서 마침 제가 알고 있는 부분을 조금 알려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강론 들으면서 중간에 이 강론 딱 자매님께 전해드리면 정말 좋겠네 하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는 바로 어제 카톡에 남기신 메시지의 한 내용 때문입니다. 베드로씨가 나를 잘 보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것이야 주님만이 아시겠죠. 이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이 내용에 대해서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은 저 입장에서도 누군가가 저를 잘 봐주신다면 자기 자신은 자기가 더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보다 더 잘 봐준다면 당연히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제가 그 말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신부님 강론 중에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봐도 볼 수 없는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순간 제 머리에는 어제 말씀하신 그 내용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자매님을 좋게 생각하는 게 제가 잘못 보고 자매님을 좋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니 모르겠어요 라고 말씀하셨으리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럼 제가 이제 내용을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신부님 강론 말씀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런 부분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다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영안이 열려 있다면요. 그렇다고 제 영안이 열려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 자매님께서는 의식하시지는 못하지만 뭔가 선하고 좋은 모습을 보였기에 제가 그걸 느낀 것이겠죠. 그때 하느님께서 저에게 그걸 그 순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영안이 열려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게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령 자매님의 어떤 모습에 어떤 한 형제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은총을 받았다면 결국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수 있는 통로를 자매님을 통해 주셨고 또 자매님을 도구로 활용하셨다면 하느님 일에 좋은 쓰임으로 쓰임을 입었다고 생각하시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뜻으로 마지막에 이런 문자를 남겼던 것입니다.


 스스로는 모르지만 상대방이 좋게 느꼈다면 그것도 하나의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신 은총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저도 그냥 제 생각을 고민해서 보내드린 것도 아닌데 이런 걸 강론에서 들으니 귀가 솔깃했던 것입니다. 나름 뭔가 의미를 다시 전달하려다 보니 생각보다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아마 그 신부님의 강론 핵심은 충분히 전해드린 것 같습니다. 부족하지만 마음속에 은혜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매님,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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