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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신도가 본 수도자의 삶 1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4 조회수1,267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실 영세를 받기 전에 이미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에 지금 본당에 신부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그때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사제가 되는 길이 힘들다고 해서 포기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떻게 지금 다니는 본당에서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영세를 받고 그냥 평범하게 평신도로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제의 길을 걷고 싶었던 것은 제 인생이 참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집이 불교 집안이다 보니 아무래도 어머니 따라 절을 많이 다녔겠지요. 또 어머니께서는 불심이 깊다 보니 절에서 불사를 하는 경우가 있으면 자식들을 위해서 불사도 하십니다.

 

저는 제가 영세 받기 전에 이미 합천 해인사에 어머니께서 저는 잘 모르지만 상당한 돈을 주고 부처님께 무슨 공양 비슷하게 올린 것이 있습니다. 그건 제가 영세 받기 전이니까 한번은 제가 영세 후에 기분이 찜찜해서 해인사에 가서 제가 이제 천주교 신자이니까 제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부처님께 봉양한 거 없애달라고도 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무튼 집안이 이런 집안이다 보니 저희 집엔 스님도 가끔 한 번씩 오십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사실 스님이이기 이전에 참 스님이 멋지십니다. 남자인 제가 봐도 원래 스님은 머리를 민머리로 하지 않습니까? 민머리인 머리인데도 정말 멋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한번은 스님께 여쭤봤습니다.

 

스님은 왜 스님이 되셨어요? 스님이 되셨으면 무슨 동기가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랑 워낙 어려서부터 자주 봐왔던 스님이라 스님과 저랑 이야기할 때는 그냥 삼촌과 조카가 대화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말 마라, 중 팔자는 더러운 팔자다. 정말 중 팔자는 할 게 못된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당시에서는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속되게 부르는 땡중도 있습니다만 그런 걸 제외하고는 그래도 사회적으로 스님하면 나름 존경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사회에선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신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쭤봤습니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 그날 저랑 스님이랑 제방에서 같이 자려고 하다가 문득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그만 그걸 여쭤보다가 스님이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와 다시 태어나면 죽어도 중은 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땡중은 땡중이니까 별도로 하고요 정말 정식적으로 스님이 된 사람은 우리가 그냥 평범한 범인이 보기엔 정말 한마디로 어찌 보면 속되게 표현해서 사람들이 정말 일반사람들에 비해 놀고 먹는 직업이라고도 하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근데 스님 말씀을 들어 보니 정말 스님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스님께서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기 쉬운 말로 세상에서 힘들고 인생이 험난한 고난과 마주쳐서 헤어나기 힘든 인생이 전개될 때 그냥 세상만사 모든 걸 끊고 머리나 깎고 중이나 될까 이런 말을 쉽게 많이들 한다고 합니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런 마음 먹고 만약에 중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백이면 백 다 중간에 포기하고 나중에는 오히려 세상에서 근심하고 살아가는 게 중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생각해 다시는 스님이 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님들 세계에서는 중도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고 이것도 일종의 세상말로 팔자이고 운명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더 철학적인 말이 있는데요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표현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렇게 스님 이야기를 장구하게 늘어놨느냐면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스님이 난데없이 저한테 어느날은 이러시는 게 아닙니까? , 만연아, 니 중 한번 되고 싶지 않냐? 제가 웃으면서 스님, 예전에 저한테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으면서 일장연설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중팔자에 대해서요. 그렇게 말씀하셔놨고 저보러 중이 되라고요? 중이 되면 뭐가 좋고 뭐가 좋고 이런 말씀을 들어도 할까 말까 할 형편인데 완전 고달픈 인생사라는 걸 이야기하셔놨고 저를 스님이 되라고 하시는 이유가 뭣입니까? 하고 여쭤보니 하시는 말씀이 나도 다시는 중을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까지 내가 스님을 하면서 너네 집을 다니면서 너를 보니 너는 중이 되면 딱 어울릴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 스님, 이거 무슨 말씀이세요. 저 머리 깎은 제 두상을 상상을 해 보니 정말 최악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하고 싶은 생각없습니다. 이렇게 이 스님은 그때부터 저를 보면 저를 스님을 만들어보려고 안간힘을 다 쓰셨습니다. 어쨌든 지금 제가 스님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 스님 말씀대로 스님이 되는 길을 가지 않았겠지요? 나중에서야 알았던 사실이지만 이 스님은 왜 저를 스님으로 만들려고 했는지 알았습니다. 중 팔자가 험난한 팔자인데도 저는 만약 하면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또 하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오랫동안 저랑 이야기를 하면 스님께서 불교 야사를 많이 이야기해 주십니다. 

 

근데 이 스님은 워낙 머리가 뛰어난 분이고 아무튼 불교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데도 정말 입담이 아주 좋으십니다. 근데 저는 그냥 흥미롭게 들었는데 스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랑 이야기하면 어른이 됐든 젊은 사람에게는 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데 저 같은 경우는 어쩌다 보니 저희 집에 오시고 하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저랑 단둘이 스님과 제 방에서 자다 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게 되었던 겁니다.

 

근데 스님께서 결정적으로 저를 스님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은 이유는 보통사람 같으면 이런 불교 야사는 그냥 흔히들 수면제 같은 이야기인데 저는 그 야사를 들려주시면 스님께서 제 눈을 그당시 봤을 때 스님 눈에는 정말 독특하게 느껴셨던 모양입니다. 제 눈이 스님의 이야기에 그냥 몰입을 하는 눈이고 그냥 스님 이야기에 상당히 호기심을 가지는 눈빛을 읽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요놈은 좀 특별한 놈이라는 생각이 드셨고 자기는 중이 좋지 않지만 저는 중이 되면 훌륭한 중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셔서 저를 그래서 스님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께 정색을 하면서 스님께 약간 웃으면서 말씀드렸죠.

 

스님, 누구 인생 완전 수렁에 빠뜨리려고 하세요 하고 스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말씀드린 것은 저는 좀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 면에서 개신교에 몸을 담을 때도 보통 목사님들이 저를 보고 목사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하시고 저를 목사를 만들려고 많이 권유를 하셨습니다. 이런 일련의 제 짧은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더 늦기 전에 혹시라도 성직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성직자의 삶을 사는 게 어떨까를 생각하다가 저는 한번 나름 세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봤습니다.

 

스님, 목사, 신부. 이 세 성직자 중에서 제일 저한테 맞을 것 같은 게 그래도 신부님이 제일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님은 머리를 깎아야되서 두상이 영 아니고 목사님이 된다고 하면 목사가 됐다고 제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니 그것도 영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신부님이 제일 괜찮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신부님께 찾아갔지만 이미 나이가 많아서 되지를 않았던 거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만약 정말 간절하게 조르고 조르고 했으면 잘하면 신학대를 한국이 아니더라도 외국에는 우리 한국보다 좀 자유롭기 때문에 아무래도 성소자가 별로 없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만약 그때 그런 길을 갔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저도 사제의 길을 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수도자에 대해서 나름 생각하는 게 많이 있었겠죠. 영세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모 천주교 카페에서 카페활동을 하다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자매님께서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그 글 내용은 제가 지금은 오래된 일이라 자세한 기억은 할 수 없지만 핵심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제의 신분에 대해 즉 오늘날 신부님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과 지금의 천주교 교계제도에 대해 신날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저도 그 글을 보고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이런 글을 보고 만약에 신부님들이 보신다면 분명 그 카페에 신부님께서 분명히 보실 테고 또 그 카페 회원도 그 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 이 부분에 대해 염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글을 보고 조금 고민하면서 바로 그 자매님의 글에 대해서 제가 나름 수도자의 길이 어떤지를 바로 생각하는 바를 알려드리려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잘못 나서면 일을 자칫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생각해서 잠시 시간을 두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생각에 그냥 그 카페에 어떤 대답이 올라올지를 계속 로그인하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했지만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신부님이나 또 일반 카페 회원 누구하나 그 자매님께서 올리신 글에 대해 변호를 하는 분이 없어서 제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나름 그 자매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한 게 아니라 그동안 생각해왔던 수도자의 삶에 대해 묵상한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때는 제가 마침 어머니께서 투병하시는 중이라서 수도원을 거의 매일 가다시피해서 수도원에 계신 신부님과 수사님들과 지속적으로 계속 함께 수도원에서 정해진 기도 시간에 맞추어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 수도원에 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수도원에 계신 수도자분들을 보면서 저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런 기도를 하시는데 거의 매일을 기도 생활이 주가 되는 분들인데 저분들은 기도를 하면 무슨 기도를 하실까 하는 게 항상 제 머릿속에 의문으로 남은 하나의 화두였고 그래서 때로는 그 화두를 가지고 기도실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겨봤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그런 일을 제가 겪게 되다 보니 제가 묵상한 내용을 카페에 올렸습니다. 저는 그 카페의 신부님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또 그 카페를 운영하는 운영진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카페 회원 중 한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글을 올렸는데요 올리고 나서 그 자매님께서 제 글을 읽어보시고 나서 바로 제 글에 댓글을 올리셨더군요. 제 글을 보고 자기가 엄청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걸 알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셨습니다.

 

사실 그때 제가 올린 글이 지금은 없습니다. 그때 올린 글은 전혀 어떤 글을 올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시간이 약 한 3년이 흐른 시점이다 보니 지금의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수도자의 삶이 어떤지를 잠시 후에 정리해서 올려보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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