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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5) 벗어나기 (아들은 삼태백)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21 조회수708 추천수11 반대(0) 신고

 

낮에는 하루종일 혼자 지내던 일상이 요즘 들어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들이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36개월 동안의 군복무 대체 근무를 마치고 무사귀환을 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얼마나 사고가 많은 세상입니까?

현역에서 복무하는 군인들도 그렇지만 객지에 나가 대체복무를 하는 젊은이들도 사고가 많아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와야 휴우! 안심을 하는 어머니들입니다.

그래서 우선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주님의 은총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느날 불쑥 그러더라구요.

"아이구! 삼태백이야! 내가 삼태백이가 될 줄은 몰랐네!"

순간 난 무슨 뜻인줄 몰랐습니다.

"삼태백이가 뭐야?"

하다가 퍼뜩 이태백이란 말이 떠오르더군요. 이십대 백수라는 말이요.

" 아! 삼태백이? 나이가 삼십이니 삼태백이란 말이지? 삼십대 백수! 거 말 되네."

깔깔 웃으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냥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답니다.

 

우리 아들은 지금 백수랍니다.

전문의(醫) 과정 시험에서 떨어져 부득이 다시 연말쯤에 재도전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당장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가려면 없는건 아니지만 이왕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배낭여행이라도 다녀올 계획으로 쉬고 있습니다.

한 번 직장에 매이면 여간해선 긴 휴가는 얻지 못할 것이므로 이참에 한 두달간의 해외여행을 생각하고 있지만 어쨋든 소속이 없으니 백수는 백수입니다.

 

대학 갈 때  재수하고, 의사면허시험 볼 때 하필이면 수술을 하게 되어 그 후유증으로 떨어져 재수하고, 대학병원 인턴 떨어져 중소병원에 후기 지원하고, 전문의 과정 떨어져 군대 가더니 이제 또 떨어져 끝내는 백수가 되었습니다.

왜? 도대체? 우리 아이는 한 번에 철커덕 되는 일이 없는지, 왜 이리 운도 없는지, 걸리는 액도 많은지, 어느땐  짜증도 나더이다.  그래도 본인이 실망하는데 엄마까지 거들수는 없는 일, 그때마다 난 새옹지마를 들먹였지요.

 

"재수까지 7년동안 너무 너무 힘들었으니 의사시험 떨어진 건 쉬라는 뜻일 거야, 넌 몸이 약해서 쉬지 못하면 쓰러질지도 몰라. 인턴하다가 녹초가 되어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아니잖아? 푹 쉬고 나서 몇달간 다시 공부해서 붙으면 되지, 사정없이 낙제 시키는 의대, 6년만에 졸업한 것만도 어디냐? 비싼 등록금 가외로 더 내진 않았잖니? 됐어.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다." 하고 위로했더니 "정말?" 하고 씩 웃더이다. 

사실 그럴 때마다 난 주님과 성모님을 떠올리며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적엔 쉬어가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것이 내자식에게 주시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인턴하는 일년 내내 집에도 한 번 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살다가 전문의 과정 떨어져 실망할 적에도 "넌 체력이 물르고 약해서 길게 하는 강행군엔 견디기 힘들어. 4년간의 수련 도중에 지쳐서 탈락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공중보건의로 가서 3년간 좀 충전하고 오는게 나을지도 몰라. 전화위복이 될지도 몰라." 하고 위로했지요.

 

그래서 그래도 비교적 시간이 널널한 대체복무를 하면서 8년간의 긴장, 아니 정확히 따지면 재수 1년, 의대 6년, 면허시험에서 떨어져 다시 재수 1년, 인턴 1년, 도합 9년과 고교시절 3년까지 합하면 12년동안의 시험지옥과 긴장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충전을 한 편인데,  백수가 되어 아예 휴식을 취하게 될 줄이야.

내 특유의 여유만만함이 또 발동을 했지요. 

"까짓거, 괜찮아. 인생은 긴데 일년쯤 더 쉬었다 간다고 세월이 좀먹는다더냐? 나하고 여기 저기 여행이나 다니자."

 

사실 난 일을 함에 있어서도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내일 못하면 모레 하지, 하는 성격입니다.

좋게 말하면 여유만만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을러터진 성격이지요.

그래도 그게 살기가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콩튀듯 팥튀듯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아들이 3년 동안 자취생활 하면서 마련한 살림살이를 한트럭 싣고 와서 한동안 집안이 정리하느라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는 일, 새로운 살림살이들을 쑤셔넣자니 머리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습니다.

냉장고도 두 개가 되었고, TV도 두 개, 밥솥도 두 개, 데팔 주전자도 두 개, 컴퓨터도 두 개, 청소기도 두 개, 전기난로 온풍기 토스터기,책상 책꽂이, 침대....

그나마 벽걸이 에어컨은 팔고 왔으니 망정이지.......

 

그런데 아주 아줌마가 다 되어 돌아온 거 있죠?

완전히 살림꾼이 되어 있더라구요.

며칠동안 제 물건들을 꼼꼼하게도 씻고 닦고 챙기는데 전업주부 수준이더라구요.

밤시간에 차 끌고 슬그머니 나갔다 싶으면 영등포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가서 이것 저것 한보따리씩 쇼핑을 해오기도 합니다. 주로 음식 재료가 많습니다.

궁중 너비아니, 떡갈비, 카레, 우유, 세제에 도토리묵까지....

그런데 꼭 새끼가 붙어있는(공짜로 덤으로 주는 작은 것이 매달려 있는) 제품을 골라 사오는 것도 어쩌면 알뜰 주부 수준입니다.

밥을 안칠 때는 손을 넣어 손등에 물이 찰랑거리게 와야 고실고실하게 밥이 된다는 둥, 설거지는 그때그때 바로 바로 해야 부엌이 깨끗하고 냄새가 안난다는 둥,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합니다.

 

그래도 이제 난 안심입니다.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겠다는 안도감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없어도 이 아이는 굶어 죽을 염려는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입니다.

내가, 이 엄마가 없으면, 편식이 심한 아이가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살까?

내가 없으면 공부나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늘 걱정하던 아이가 이제 내가 없어도 끄떡없이 세상을 살아가겠구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례를 심하게 했던 아이가 이제 몸도 튼튼해졌습니다.

심약하고 내성적이고 여리기만 했던 아이가 이젠 목소리가 커지고 담대해졌습니다.

 

이젠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 같아 홀가분하고 안심입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보살피고 의식해야 한다는게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집착한다는 게 얼마나 긴장의 연속인지 모릅니다.

늘 잘못 될까봐, 약한 아이가 제대로 커 줄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왔던 세월을 이젠 놓아버려도 될 것 같아 백수가 된 자식을 보아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제 방에서 컴 두드리는 소리, 왔다 갔다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걸 보면서 4년만에 모처럼 함께 있는 시간이 마음을 푸욱 놓이게 합니다.

삼년동안 교통사고로 세 번이나 입원을 했었는데, 이제 장거리 운행에서 오던 그런 걱정에서도 많이 벗어났습니다.

심심하면 "우리 드라이브나 가는 게 어때?" "꽃구경이나 갈까?" 하면서 기사로 부려먹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는 장롱면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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