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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독서 (스바3,14-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31 조회수1,395 추천수0 반대(0) 신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독서 (스바3,14-18)

 

 

 

주님께서 보호하셨다' 이름 뜻을 지닌 '스바니야'서의 작중 연대를 1장의 머리글을 보면 요시야 임금 통치 시절(b.c.640-609년)로 제시한다.

한 세기 이상 고대 근동 전체를 호령하던 아시리아 대제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 임금 요시야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를 근절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다(2열왕23,4-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 선포한다.

스바니야서는 니네베의 파괴를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계시한다.

 

스바니야서의 대부분은 요시야 임금의 통치 시절과 부합하지만 일부 대목은 유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예를들어 오늘 독서의 예루살렘의 재건을 노래하는 마지막 대목 3장 14-20절은 이 책의 다른 대목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늦게 곧 6세기 말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바니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부분(1,2~2,3)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신탁이다.

그들은 야훼 종교와 주변의 다른 다신교를 혼합함으써 결과적으로 야훼 하느님의 주권과 권능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다.

 

둘째부분(2,4-15)은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을 거슬러 선포한 신탁이다.

주님의 주권은 사방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에게까지도 미친다.

 

마지막 세째부분(3장)은 다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먼저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지도자, 통치자, 예언자, 사제들의 잘못을 고발함으로써 그 곳을 단죄한다(3,1-4).

 

대신과 판관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사제들은 종교 혼합주의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

이런 예루살렘의 불의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시는 공정한 분이시다(3,5).

 

그분은 당신의 도읍인 예루살렘만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빗나갔다(3,7).

 

그래서 그분은 뭇 민족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3,8~9).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적은 수의 겸손한 이들을 살아남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스바3,12~13)

 

주님께서 친히 보살피시고 다스리시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도성 시온은 회복되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온 세상 민족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3,16~20참조).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스바3,14)

 

여기서 제시되는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 딸' 모두 동격이다.

'환성을 올려라'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점층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 기쁨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환성을 올려라' 해당하는 '란니'(ranni)의 기본형 '라난'(rannan)'소리내어 노래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쁨에 겨워 크게 소리내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크게 소리쳐라' 해당하는 '하리우'(hariu)의 기본형 '루아흐'(ruah)'부르짖다', '외치다', '즐거이 부르다'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부르짖듯 큰소리로 즐거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표현에서 사용된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웨알레지'(wealezi)의 원형 '알라즈'(allaz) '기뻐 날뛰다','몹시 기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쟁의 승리와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하여 잔치를 열거나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기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sing', 'shout out', 'be glad and rejoice' 라는 점층적 표현을 쓸 수 있겠다.

본절에 사용된 이러한 점층적 표현은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실 선민의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선민의 이러한 기쁨에 대한 세 단문처럼,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이 3장 17절 하반부에 점층적 표현으로 교차 대구를  이루며 나온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 하시리라." (스바3,17)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려 기뻐하시리라'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삼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하느님의 분노와 진노의 대상이었던 선민들이 완전히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은 '그가 베푸는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조용히 그 사랑을 향유하실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그 사랑에 스스로 빠져서 만족과 기쁨으로  잠잠히 안식하실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보다 더욱 절실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용사의 강한 이미지(스바3,17절 전반부)가 그가 구원을 베푸신 그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으로 놀랍게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스바3,17절 후반부).

 

 이러한 선민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을 묘사하는 표현결국 하느님의 선민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장차 선민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흠없이 거룩하게 성화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rest(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스바니야서 3장 14절-17절은 히브리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교차 대구 구조 이루어졌다.

 

a. 선민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14절)  - a'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17절 하반부)

 

b. 주님께서 형벌을 제거하고   - b' 주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심(17절 상반부)  원수를 쫓아냄(15절 상반부)

 

c.주님의 임재(15절 하반부)    -c' 주님의 임재(17절 상반부)

 

d.불행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임   -d'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함(16절 하반부) (15절 하반부)

 

이렇게 스바니아서 3장 16절 상반부'그 날' 중심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선민들로 하여금 이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날, 결정적인 '그 날'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 날을 바라보고 주어진 현실 가운데에서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굳게 설 것을 권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선민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스바3,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란 표현은 주님의 사죄의 은총 나타낸다.

여기서 '거두시고'로 번역된 '헤씨르'(hesir)'제하다', '제거하다'란 뜻의 동사 '쑤르'(sur)의 사역형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행하신 하느님의 주권적 역사를 '쑤르'란 동사를 사용하여 다시 한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11절)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하는 형벌을 제거하기까지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신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만이 진정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부적 위협마저 철저히 제거하신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쫓아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판결'(형벌)은 주님께서 판결하여 내리시기로 결정하신 심판을 의미하며 '원수'심판의 형벌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서 모으셨던 이방의 여러나라와 민족들(8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심판을 끝마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남은 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힘 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스바3,16)

 

'두려워하지 마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이어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간접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손을 늘어뜨린다'고 하는 것은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묘사하는 히브리적 관용구이다(2사무4,1; 이사13,7; 예레6,24).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그들의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것도 그리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그들 앞에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떤 대적, 어떤 전쟁에서도 그들은 패하지 않으며, 어떤 원수도 그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니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스바3,17)

 

'승리의 용사' 해당하는 '낍보르'(gibor)는 전투의 문맥에서는 '용사', '전사'를 언급하고 있다.(여호1,14; 6,2; 판관5,13; 2사무1,19 등).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께 적용될 경우에는 단순히 '용사'를 언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전능하신 용사'라는 개념을 내포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용사이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이사10,21).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모든 전투에서 구원하시며 승리로 이끄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 안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스바3,18)

 

새 성경의 번역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여기서 선민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이것은 이방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신분의 제약으로 '축제'(절기)때마다 그 '축제'(절기)를 지켜야하는 장소였던 예루살렘에 사실상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임을 전제한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들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항상 근심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는데(이것이 '불행'이요, '모욕'으로 표현), 본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그 날에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마음껏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축제(절기)를 지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회복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모욕(치욕)의 짐은 벗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에인카림에 있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묵주의 기도로 보면 환희의 신비 2단을 묵상하는 날이다.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로 정한 것은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을 수태한 성모님이 구약과 신약의 교량 역할을 하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엘리사벳에게서 수태되었기에 구세사 안에서 보잘것 없는 시골뜨기요, 촌부인 그들에게 이루어 놓으신 위대한 주님의 업적을 나누고, 기리고,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다.  

단순히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엘리사벳을 도와주기 위해 봉사하고 애덕을 실천하러 간 것이 아니다.

 

교회가 루카복음 1장 39~56절의 말씀과 더불어 스바니야서 3장 14~18절을 묵상하는 것'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 자모이신 성교회를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로 보기 떄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과 지옥과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속사(인간사)를 구원의 역사로 바꾸시는 단초'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서 성모 마리아 엘리사벳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수태한 성모 마리아를 엘리사벳이 '주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루카1,43)로 알아보고 그 태중의 예수님을 알아 뵌 것은 성령으로 가득차서(루카1,41)가능한 것이다.

 

성모님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태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성모님의 인사말에 즐거워 뛰놀았다라는 것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아니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원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무죄하신 주님께서 인류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실 것이기에 이제 악의 세력들은 완전히 패배할 것임을 스바니야서 3장 15절에서 미리 예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과 엘리사벳처럼 기뻐할 수 밖에 없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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