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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값진 순 나르드 향유'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09 조회수631 추천수4 반대(0) 신고

<값진 순 나르드 향유>(요한12,1-1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다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으 가운데 하날로서 나주에 예수님을 팔아 넘길 유다 이스가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 * * * * * *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대로 본다. 즉 우리의 생각대로 보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볼 수도 있다. 보이는 대로 볼 때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이다. 겉만보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요 피동적으로 보는 것이다. 보기는 보았지만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결국 본 것이 아니라 그냥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보는 척 했을 뿐이다.


그러나 보려는 대로 보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갖고,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보고 자세히 본다. 그리고 마음으로 보고 생각을 쫓아가며 본다. 일일이 자기가 본 것을 머리 속에 입력하면서 본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본다. 따라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이 다르고 보는 관점이 다르다.

 

본다는 것은 한자로 관(觀)을 쓴다. 인생관, 가치관, 물질관, 내세관, 신앙관 등 관은 여러 곳에 쓰인다. 이처럼 우리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보는 것"이다. 신앙은 보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보는 것은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 즉 어떤 생각으로 보는 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여인에게서 향유는 아주 귀한 것이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름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를 위해 사용하던 비싼 향유를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였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 가꾸었던 향유 그리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머리카락 등을 전부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였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를 알았다. 아니 그 대상을 찾은 것이다.

 

그 대상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분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는 그 누구로부터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예수님한테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사용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사용하여도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더 좋은 것으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사용하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이후에 예수님의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모델이다. 그녀는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그리고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한 여인이다. 한마디로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것은 사랑의 행위였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행위였다.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비싼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을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도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마리의 사랑은 삼백 데나리온어치의 사랑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사랑이었다.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사랑은 얼마 정도의 사랑이었는가? 그에게 삼백 데나리온은 엄청난 액수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삼백 데나리온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다는 제자이면서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 유다는 제자이면서 스승한테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없었다. 스승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가 관심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돈이었다. 돈만 생각하는 그에게 삼백 데나리온은 정말 큰 돈이었다.

그것도 유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기 위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사용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였다.

 

차리라 그 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도 정말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복음은 기록하였다. 결국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한테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했고 유다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도둑놈의 마음으로 마리아의 행동을 판단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또는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일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마리아의 행동은 너무나 잘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르시기를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그래서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마리아를 칭찬해주셨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한 이웃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이 곧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가난한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던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수석 사제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큰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 편으로 떨어져 나가는 유다인들을 막기 위하여 예수님과 라자로를 함께 죽이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따른 행동이 나오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성주간을 시작하였다. 성주간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슬퍼하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묵상은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는 것이지 깊이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 묵상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좀 더 관심있게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슬퍼하기보다는 감사드리고 나도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치 마리아가 자기의 가장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기 위해 사용하였듯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슬퍼하고 동참하고 싶으면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말로만 슬퍼하고 안되었다하고 동정하고 실제로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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