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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녹이야기(히브리서 11:5-6 )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23 조회수1,205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를 묵상하며 (2)

 

 

에녹이야기

히브리서 11:5-6 

5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데려 가시기 전부터 그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멘

 

믿음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벨의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에 에녹의 이야기를 붙이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에녹과 같은 혹은 엘리야와 같은 그렇게 죽음을 보지않고 하느님 나라로 올라간 그 사람을 부러워하죠. 그사람들은 아마 신앙생활을 통하여 죽음이 무엇인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일거에요. 그러니까 그 육의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거죠. 신앙생활을 통하여 계속 죽어본 사람은 오히려 그날이 더욱더 기다려질텐데. 그런데 죽음이 무서우니까 나도 그렇게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하느님나라로 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안되고 골로사이서 113절을 보면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살아있는 상태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상태란 말입니다

지금 에녹이 간곳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어떤 교훈적인 그림인거지 절대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도 맛보지 않고 그대로 하느님나라로 갈 것이다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가 다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여기에서 사람들 비위 맞춰주고 또 이세상에서 인간들이 행복과 가치라고 상징해놓은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다 라는 것을 알게되면 그때부터는 그 모든게 이게 다가 아니다.

 

에녹이 하느님과 동행했는데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년을 동행했다고 그래요 창세기 5장에서, 그러면 육십오세 이전에는 평안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하느님의 계시가 내려와요. 므두셀라, 창 던지는자가 창을 던져서 상대방의 적장을 먼저 죽이면 이쪽이 승리하는거고 이 창 던지는 자가 먼저 죽으면 그 전쟁은 끝나는거거든요. 심판을 의미하는 므두셀라. 그래서 므두셀라라는 단어를 히브리사람들은 '네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 혹은 네가 죽으면 새 세상이 열린다' 이런 의미로 사용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육십오세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계시와 함께 아들이 난 거에요. '얘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 얘가 언제 죽을지 하느님이 말 안해줬어요. 그런데 옛날에 고대시대 때 유아 사망율이 굉장히 높았어요, 오늘 얘 죽으면 어떻게 해요 .

종말이 이미 나에게 예고 되있는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것도 가치있는 것이 못되는거에요. 그리고는 이 사람의 온 신경은 다 종말에 가있는거죠 '언제 끝나는 거야 도대체..'

 

 

본문을 보면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 그리고 하느님이 옮기셨다' 그런다 말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이 옮기신 삶이 뭐냐면 이 세상의 재미와 이 세상의 행복과 희망을 차압 당한거 잖아요. 묵시가 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의 어떤 쾌락 기쁨 재미 이런것들이 하느님에 의해 이렇게 차압을 당하는 거죠.

녹은 삽백육십오세에 하느님의 나라로 옮겨간게 아니라 무드셀라를 낳자마자 이 세상에서 발을 든거라 말이에요 그게 세상속에서의 죽음이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믿음의 이야기를 하면서 카인에게 세상에서 맞아 죽은 아벨의 이야기에 에녹의 이야기를 붙여 놓은거지 이 두 사람이 다른 극명한 한사람은 맞아죽고 한 사람은 안죽고 하늘로 올라간 이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결국 둘다 이 세상에서 죽는 신앙인(聖徒)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하느님을 기쁘게 했다'그런데 유다서 115절에 에녹이 '야 이 세상에 분명히 종말이 있고 심판이 임한다' 라고 '예언자'로 살았다고 그래요. 그러니깐 이 에녹은 그가 뭘 믿었는지 곧 내용이 나오죠. 하느님이 계신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 '영생' '구원' '예수' )을 주신다는거에요.

하느님이 계시면서 그와 동행하여 모든것을 이 역사와 인생을 끌고간다 라는 것을 그가 믿는거예요 하느님과 동행하면은 그 길로 끌려가기 때문에 그게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거란말입니다. '하느님은 계시다 그리고 그 분이 내 삶을 끌고 가는게 맞다' 그래서 이 삶이 이 인생이 나에게 이렇게 사는것도 괜찮을것 같애 옛날 같으면 금방 파르르 떨면서 도대체 이 세상을 살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할텐데.. 하느님이 계시니까 살 만 해지는 거에요

 

우리는 그렇게 이 인생과 역사에 대해서 계속 실망하고 거기에서 한발 한발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매 순간. 죽으면서 결국 이 세상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거예요. 그게 에녹이에요 다른거 아니라니까요. 에녹도 마찬가지고 금방 제사 한번 드리고 두들겨 맞아 죽은 아벨도 마찬가지고. 그냥 이렇게 믿음으로 살면 믿음이 반드시 내 안에 들어간 하느님이 나와 동행하여 반드시 죽음으로, 다른나라로 나를 끌고 가시는구나 이 이야기를 하는게 아벨의 이야기고 에녹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내가 다른 나라로 끌려간다라는 건 내가 역사속에서 죽는다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깐 어차피 죽어야 되는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죽일려고 달려드는 그 경험 해보는거 나쁘지 않은거에요. 당연히 그 일을 겪어야 되는 것이고 ..그런 환란과 그 악몽이 우리에게 점점 所望을 거룩으로 쓰여지게 되는거란 말입니다. 다른거 없어요.

 

미가서 66. 6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내가 하느님께 무얼갖고 나가면 기뻐할까요)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제사에요7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8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여기에서 '미슈파르아사' 라는 단어는 '正義의 옷을 입는 거' 예요. 이걸 정의롭게 행하는거라 하면 여기 바로 위에 '내 삶의 열매를 드릴까' 아니라고 그러잖아요. 그거. 내 삶의 열매도 안받고 하느님을 위하여 내가 내 맏아들 바쳐도 안 받아요. 아브라함이 이삭 맏아들 이사악을 드려서 복을 받은게 아니라니깐요.

성경은 맏아들을 줘도 안받고 하느님은 맏아들도 안받고요 내 삶의 열매도 안 받는데요. 그러면서 '의의 옷을 입고 人子 (내 아들) 예수를 사랑' 하는 거에요. 바오로 서간에 몇 번이나 반복하여 나오죠.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 저주를 받은자다' 그 아들을 사랑하는게 뭐냐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셨고.. 그 분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존재일 수 없다라는 거 이 사실을 모르는 자. 그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 저주를 받은거에요.

 

고린도전서 13장 이야기처럼 뭐~몸을 불사르게 내주고 뭐~ ~전 재산을 팔아 구제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그러죠 ? 그건 내 안에 사랑이 없이 그런일을 행하는거 나쁜거야 이런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니들이 행하는 그 어떤일도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라는 뜻이지 니들이 사랑하는 마음없이 그런 일 을 행하면 하느님이 이거 안 받는다란 뜻이 아니에요. 니들이 몸을 다 불사르게 내어줘서 순교자처럼 순교를 당하고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구제를 한다고 할지라도 니들은 아가페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면 이거 다 똥이다 라는 뜻이란 말에요. 그게 미가서 6장에 이 이야기란 말입니다.

 

열매도 안 받고 맏아들도 안받아요 하느님은 의의 옷을 입어야 되고 인자를 사랑해야되요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동행하는 거에요 다른 나라로 끌고가는 동행이란 말입니다. 이세상에서 외국인이고 이방인이요 나그네로 살게하면 나그네가 이방인이 뭐 대단한거 먹으면서 산해진미 맛보며 그러고 가나요? 나그네가 어디로 가요?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되는거죠? 그 사람의 목적은 뭐 주막집에서 국밥이나 후르륵 마시고 빨리 걷는거에요. 어디로? '' 으로. 그게 나그네라니까요.

여기가 아니다 라고 이미 계시로 하느님에 의해 교훈을 받고. 여기가 아닌 다른곳으로 빨리 피난을 가야되겠다 라는걸 아는 이들은 허리띠 동여매고 신발끈 꽉 매고 달리는거에요 그냥 . 여기에서 도망가는 길밖에 없다니깐요. 그런데 어떤길로 가야되냐면 예수라는 길로 가는거에요. 예수를 붙들고. 그 예수에게 꼭 붙어서 예수가 끌고 가는 그 길로 쫒아가는거에요.

그런데 예수가 어디로 끌고가냐 하면. 자기가 달렸던 그 십자가로 끌고간단 말에요. 계속 죽여내는거에요. 그러니깐 오히려 이러한 세상의 풍파와 질고를 다 겪으면서 아~여기 이런것들이 나를 점점 이렇게 크게 흔들지 못하는 그러한 경험을 해 나가는게 육의 죽음을 이세상에서 경험하는거에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8장에 율법헉자 하나가 와서 '선생님 내가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그러냐하면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8절에 그래요. 너 네가 나에게 와서 지금 이 세상적인 어떤것 혹은 나에게 무슨 교훈을 받던지 뭘 배우던지 해서 너의 어떤 가치를 더 이렇게 더 상승시키고 뭐 이러기 위해서 나를 찾아온거라면 너 애시당초 정신차려 이런뜻이거든요.

보세요. 제자 교육, 제자 훈련 자꾸 이딴소리들 하는데 '제자' 라는 단어 자체가 예수가 성경이 나를 어떻게 바꿔내는 교관 스승이 되면은 제자들은 항상 스승이 '야! 이제 됐다' 그러면은 어떤 지점에 올라가서 하산을 하는게 제자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이나 예수를 선생 랍비라고 불러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분 나빠한거예요. 선생으로 삼아서 아 세상에서 내가 내 가치를 높이는데 그 어떤 교훈이나 뭘 받아낼려고 그를 성경이나 예수를 선생으로 취급하게 되면 결국 목적은 하산할 정도가 되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 에게 있는 거란 말에요

 

하산 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기 위한... 이게 學者가 원했던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는 머리 둘 곳이 없어' 사라졌어요. 또 제자중에 하나가 또 와서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장례좀 치르고 와도 돼요?' 예수님 왈 '안된다 죽은자는 죽은자에게 장사지내게 하라' 그게 엘리사가 부름을 받았을때.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다른책에서 보면... 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는 그 이야기가 엘리사의 이야기이거든요. 이 세상에서의 어떤 내 가치와 나의 내가 가치로 소유하고 있는.... 나의 존재의 확장으로 소유하고 있는 그 관계라는 거.. 있죠 이것까지도 하느님이 다 깨버리는거에요.

동냥을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말라는 말. 이 쪽박을 갖고와서 여기에 뭘 담아주면 '내가 내 인생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내 가치와 자존심을 챙겨낼수 있으니까...여기다가 뭘 채워주세요' 이게 율법주의에요. 내가 준비해간 뭐가 있는 거에요 ..근거가 있는거에요. 내 가족이든지.. .. 나의 지식 이든지... 아니면 뭐.. 하여튼 나의 열정이든. 그런데 예수님이 그 쪽박을 지금 깨버리는거에요. 그걸 갖고와서 거기에 뭘 담아 니가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위해 날 찾았다면 너희들은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면 그게 그 그런자들은 절대 하느님의 제자가 될수 없는거죠.

 

그리고는 성경에 예수님이 주무시는 장면이 딱 한번 나오는데(마르4,38) 바로 그 밑에 풍랑위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이 나와요. 그건 무슨 말이냐면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라고 이야기하죠. 무슨말이냐면 이 관계 그리고 내 쪽박을 갖고....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괜찮은 평가를 받는 자가 되기위해 하느님을 믿고 종교를 갖는 자들은 절대 세상의 풍랑속에서 안식 잠을 잘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만이 그런 세상의 풍랑이 치는데 왜 하필 거기서 주무시냐구요 딴데서 자도 되는데. 그 풍랑이 이는데...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풍랑도 십자가같은 풍랑도 그를 어찌할 수 없다 라는 거에요. -(시편44,23)나의 주여, 일어나소서. 어찌하여 잠들어 계십니까? 깨어나소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렵니까? -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머리 둘 곳 없지만.... 하느님나라에 머리두고 세상의 풍랑속에서 잔다 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라는 그 고난과 환란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겨나는 변화들인거에요. 그런데 그게 진짜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아는거에요.

 

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하냐면 '세상이 너희들을 분명히 이제 때려 죽일건데 봐라 내가 살아났잖니!' 성경이 뭐라고 그래요? 우리가 죽음에 동참하고 부활에도 동참하여 살아났다 그러잖아요. '내가 살아났잖니. 너희들 그거 죽는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죽어야 나처럼 사는 거니까 그게 죽는것처럼 악악거리지 마라' 고 부활이야길 해준거에요. 그게 '죽도록 충성하라' 에요. 죽을때까지 살아있으라.

그러니까 우리는 에녹을 함부로 부러워하거나 그러면 안돼요. 지금 그 에녹의 삶을 사는거에요. 아니 멀쩡한 세상에 진짜로 므두셀라가 죽는 그날 노아가 육백세 되는 해이거든요 계산해 보면. 므두셀라가 구백육십구세에 죽었으니까 진짜 딱 죽자마자. 그해부터 비오기 시작했다구요. 그리고는 온 세상이 싹 사라졌어요 저주의 바다 밑으로.



그런데 에녹이 그걸 계시로 알았는데 그 세상에다 뭘 쌓았겠냐구요. 세상 사람들이 이미 다 이제 사라질걸 아는데 (여덟명 이외에는) 그 사람들로부터 무슨 평가를 받기를 원했겠으며 삼 백년 동안 욕 바가지로 먹었단 말이예요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노아가 배 짖고 백이십(120)년동안 열심히 그 사람들한테 욕 먹을때 므두셀라가 같이 살아있었다니까요.

하마터면 그 할아버지도 그 방주에 들어갈뻔한건데 뭐. 그게 그렇게 '이 세상은 이미 심판에 처한거고 사라질것이고 너희들의 평판이나 이런것들 나에게 소중한거 아니야 하느님은 그런걸 사용하여 나에게 뭘 교훈하시는 거지 그래서 괜찮아' 이게 세상에 대해서 죽는거에요. 그거 힘들어요. 세상이 나와 함께 공존하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

세상을 무시하고 사는게 쉽냐구요 어렵고 아프다구요 그게 곧 나를 살리는거. 아니 계속 이 세상에서 그렇게 나는 날마다 죽는다 라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너 한번에 죽여줄께 그러면 잠깐 고통만 참으면 이제 완전히 죽게되니까 아니면 이 십년간에 나눠서 죽여줄까? 아니면 한번에 죽여줄까 그랬을때 한번에 죽여주세요 그러지 당연히 그 죽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면.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못한 이들이 그래 이 십년에 나눠서 죽여주세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살고 싶은 거에요. 에녹이 부럽고 엘리야도 부러운거에요 죽음을 통과하지 않았다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죽는게 나은거에요. 우리도 그런일이 닥쳤을때 너무 이렇게 그냥 불안해거나 두려워하거나 그러지말아요.

 

우리가 나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사랑도 누구에게 줄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 이용할려구 그래요 나의 존재 확장을 위해서. 내가 깨어지면 그게 전해져요 조금씩. 그러니까 내 피가 이 땅에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그 피의 양에 비례하여 내 안에서 하느님 예수라는 사랑이 나와갔구 전해지는거에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존재들의 삶의 양식이에요.

 

냉담교우분들이 그러드라구요. '아휴 거기서 나왔더니 왜 이렇게 맘이 편하네~!'  우리들도 그럴지도 몰라요. 그건  세상이 좋아진다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살게 안돼요. 하느님이 동행하시는한 절대 우리의 눈을 이 땅에 두게 안한다구요. 하느님이 동행하여 에녹을 하느님 나라로 데려갔다 라는거 잊지마시고.. 하느님이 동행하며 그를 채근하여 빨리 데리구 간거에요 삼백살에. 나그넨데 미적미적 하느님이 동행하면 그렇게 못살어요.

허리끈 동여매고. 그 애굽의 과월절때 처럼. 서서 밥도 먹어야 돼요 지팡이 짚고. '너 어디 갈때 있어 빨리 서둘러' 허리띠 동여매고 신을 신고 지팡이 들고 서서 과월절 예수를 먹는단말입니다. 그게 이 광야 인생 역사라는 얘기에요. 그러면 각오 단단히 하시고 인제 끌려가시면 돼요. 다른것 필요 없어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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