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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천주의 어린양)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23 조회수1,437 추천수0 반대(0) 신고

 


김웅렬신부님 복음묵상

"천주의 어린양."

+ 찬미 예수님!

작년 11월부터 배티성지에 이어

15번째 은총의 밤인데

사람이 제일 많이 왔네요.

어제 평일 복음이

무엇인지 기억나세요?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

저 분에게 가거라.’그랬어요.

저는 그저께와

어제 강론을 준비하면서

은혜를 참 많이 받았어요.

신자들에게 해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강론 준비 자체가 개인 피정이에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제자를

보내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세 가지 욕망이 있다고 그러지요?

첫 번째 식욕,

두 번째 성욕,

세 번째 권력욕이 있어요.

이것을 3대 욕망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것 말고

욕망이 하나 더 있어요. 소유욕.

어찌 보면 소유욕은 앞에 있는

세 가지를 다 아우르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소유욕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죠.

굶지 않으려면

먹을 것 준비해야 되고.

길거리에 나앉지 않으려면

뭐라도 있어야죠.

소유욕의 목적은 분명히

자기 자신과

가정을 보호하는 겁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너무 과도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많지요?

여러분 집에 전혀 여러분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 갖고

있는 것 당연히 있죠?

저도 찾아보니 많았습니다.

볼펜도 왜 그렇게 많은지,

옷도 생전 입지도 않는 것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

소유욕은 자신보호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하느님이 주신

어찌 보면 소박한 욕심인데,

그 욕심이 지나치다 보면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고

종이 될 때가 많습니다.

소유욕은 분명히 종류가 많습니다.

물질 소유욕이 있을 수 있고요,

또 자기 몸뚱이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도 있어요.

또 사람에 대한

소유욕이 많은 사람이 있어요.

어디 가든지 왕초가 되어야 돼요.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보니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삽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소원해지지 않고,

또 가능한 나를 중심으로

그 모임이 만들어지기를

바랄 때가 많지요.

어찌 보면 소유욕 중

가장 떨치기 어려운 것이

사람에 대한 소유욕이 아닌가?

세례자 요한은 당시

당신 입만 딱 다물면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 알고 있었죠.

살아 생전에 메시아를 보는구나!’

수많은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례자 요한을 중심으로

커다란 조직, 힘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자 요한 앞에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메시아 같은 분이셨고,

그에 비하면 예수님은

깔아뭉개 버리면 비빌 언덕이

없는 분이었어요.

세례자 요한은 자기 처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뒤로 제쳐놓고

예수님을 앞세웁니다.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양이 나타나셨다!

저분에게 가라.’

그렇게 이야기하면 제자들이

자기를 떠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 향하도록 합니다.

질투가 요한에게는 없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욕심과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두머리로 살아남기를

원하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절대로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낼 수가 없었죠.

최고의 자리에서

차석의 자리로 만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겸손한 자세 외에

다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본당사목뿐 아니라

이런 저런 사목을

많이 하다 보니까

많은 분들을 알아요.

그리고 또 제가 어디있던

감사하게도 말씀을

들으러 오십니다.

거기까진 좋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사제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비켜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주가 되는 겁니다.

사제는 반드시 예수님께

자리를 내드리고 비켜서야 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십자가 앞을 막고

자기가 메시아인 냥 한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까?

딴 교회 얘기하기는 싫습니다만,

요즘 TV를 보면

같은 예수님을 믿는 형제자매로서

마음 아픈 얘기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어마어마한 대형교회의 어느 목사들,

설교 들어보면 자기가 예수입니다.

예수가 자기한테 부탁하고

자기는 2000년 후에

새로 나타난 예수그리스도니

내가 한 말 지켜라.’

착실한 신자들이 예수인줄 알고

따라 다닙니다.

서글프기 이를 데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어린 양이 오셨으니

너희들은 나 쳐다보지 말고

저분 따라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야.

내가 너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저 분이야 말로 영과 육을

구원하실 분이니 저분을 쫓아가라!’

그래서 요한의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하지만 어제 성서에 보면

예수님에게 바짝 다가서지 못합니다.

두려움? 어찌 보면 경외심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

거리를 두고 따라갑니다.

이때 예수님이 뒤돌아보시면서

어정쩡하게 따라오는

그 두 제자에게 다가가십니다.

우리 쪽을 향하여 첫 걸음을

내딛으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하여 걸어가면

그분은 우리 쪽을 향하여

뛰어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하여

뛰어가면 그분은 우리를 향하여

날라 오십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징이 뭡니까?

인간 쪽에서 먼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는

종교입니다.

먼저 말을 건네시고,

먼저 치유하시려고 애쓰시고,

벌을 줘도 가죽옷을 입혀

내쫓습니다.

늘 말을 건네 오십니다.

솔직히 우리들이 예수님과

나란히 걷겠습니까?

아무리 기를 쓰고

신앙생활을 해도 예수님과

똑같이 걸을 재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 주님은

요한의 두 제자를 대하듯이

먼저 우리 쪽을 쳐다보시고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 쪽에서는 감히

하느님을 향하여 한발도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 ‘

고 하십니다.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

이제껏 내가 믿었던 분이

메시아가 아니라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났다니

무슨 뜻 인가?

요한 스승이 가라하니

쫓아는 가는데 과연

저 사람을 쫓아가서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복잡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시어

두 사람에게 인생에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너희가 찾고 있는 것이

도대체 뭔데 나를 쫓아오고 있느냐?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우리는 쫓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안전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정된 지위, 안정된 직업,

충분한 돈,

이것이 잘못된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낮은 목적이고

인생을 걸기에는

합당치 않은 목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에서

출세라고 부르는 것을

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적인

야망이라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분명히 나쁜 겁니다.

이웃에 봉사하겠다는 동기에서

출세 목적으로 삼는다면

참다운 크리스챤입니다.

여러분들 20세기 들어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 누군 줄 압니까?

소련의 스탈린은

자기의 권좌를 잡기 위하여

300만명을 숙청합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히틀러는

600만명을 죽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천주교 신자입니다.

스탈린은 어릴 때 복사서면서

신학교 가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그랬던 그 인간이 괴물로 변합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

300만명을 숙청합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죠.

카톨릭 집안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수도원에서 복사를 서던 아이가

나중에 유대인들을

말살시키는 괴물로 변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목적이 도덕적으로 숭고하지 않으면

군림할 수밖에 없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안 가리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평화를

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만이

오직 만족시켜 주실 수 있고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에게서 바라는 것이 뭐냐?’

물으시면, 뭘 바라시겠습니까?

로또복권 딱 맞는 것?

수능고사 좋은 점수 나오는 것?

요한의 제자들은 그 질문에

엉뚱하게 당신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합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장소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간단합니다.

오늘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한 말과 똑같습니다.

와서 봐라(come and see!)”

다시 말하면 머리속에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라!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성경에 기록된 그분 만났어!’ 하죠.

나타나엘이 그 동네에서

뭐 신통한 게 나와?’ 하니

필립보가 가서 보자!’합니다.

천 마디 만 마디의

이론적인 것보다 그 사람을

하느님 앞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예수님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뭘 해 줄 수 있어하며

앉혀 놓고 장황하게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

따라와! 따라와서

내가 사는 것을 지켜봐!

무슨 긴 말이 필요하니!’

오늘 여러분들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여러분들은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보고 계시고

계속해서 보실 겁니다.

사제의 입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고

또 성체성혈 축성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실 겁니다. 와서 봐라!

불러주셔서 오긴 오는데

제대로 보려면 영이 맑아야 됩니다.

맑은 영을 가진 사람은

이 미사 중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는지 압니다.

이제껏 사제로 살면서

꼬맹이들에게 세 번 비슷한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주일학교 미사 후 제의실 문을

나오는데 유치부 아이들이

셋이 쪼르륵 쫓아와서,

신부님, 신부님, 우리 봤어!”

뭘 봐?” 성모님 봤다는 것에요.

어디서?”

신부님이 예수님 몸을 올려드릴 때

성모님이 뒤에서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을 봤어요.”

진짜? 어떻게 생기셨어?

뭘 입고 계셨어?”

그 아이들 성모님 옷 색깔을

말로 표현해야 되는데.

표현이 안 되니 눈물이 그렁그렁.

그리고 성체성혈 신부님

올려드릴 때 천사들이

막 날라 다녔어요.”

그 다음부터는 성체 들면서

뒤에 혹시나 하지만,

내 눈에는 안 보여.

영안이 없나봐.

오늘 여러분들 이 자리에 와서

물론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것이

있어서 왔을 겁니다.

청하세요, 구하세요, 두드리세요.

그러나 모든 기도 끝에는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주님 원망하지 않고,

아직 때가 안 되었거나

또는 주님은 다른 방법으로

응답을 주실 것을 제가 믿습니다.’

이러한 겸손의 기도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아니겠는가?

오늘 강론은 처음의 시작이

소유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 중에서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제일 어렵다.

그런 것으로 봤을 때

세례자 요한은 보통 남자가 아니다.

자기를 최고로 알고 있는 심복들에게

너희들 잘 못 봤다.

나는 저 분 신발 끈도 풀어드릴

자격이 없어.

나는 저 분의 길을 닦는

예비자일 뿐이지.

감히 비교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어린양,

아뉴스 데이(Agnus Dei)!

저 분 쫓아가야 된다.’

진정 세례자 요한은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아침에 눈뜨면 분명히

죽을 날이 가까워지는 걸 알고,

또 하나씩 포기해야 됨을 압니다.

영성 중에 제일 어려운 영성이

포기의 영성입니다.

하나 포기했다 싶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다섯 개가

또 달라붙어 있어요

불교에서는 우리처럼 은총이라는

개념이 없어 도 닦는 것이

수백 배 어렵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공로와

하느님의 은총이 있죠.

우리의 부족한 부분은

은총으로 채워지지만,

불교는 오직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에요.

그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쉬운 게 아니죠.

오늘 뭘 원하는 지조차도 모르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와서 봐라는 와서 자거나,

와서 분심 속에

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은총의 밤이

내 생애의 마지막 은총의 밤을

지내는 마음으로,

내 생애의 마지막 강론을

듣는 마음으로,

내 생애의 마지막 성체를

영하는 마음으로,

내 생애의 마지막 성시간을

보내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머물러라

그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신 여러분들,

정말 대박 터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생각지 못했던 것까지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191월 은총의 밤(01/05)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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