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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음과 하늘나라 신비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27 조회수351 추천수3 반대(0) 신고

 

늦었지만 오늘 묵상한 부분을 한번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아는 것과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의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미묘하고 오묘한 섭리를 통찰해서 느낄 수 있는 말하자면 신비와 같은 것과의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또 그 차이가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골똘히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신체의 감각기관 중 눈과 귀가 나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들을 수 없는 귀와 볼 수 없는 눈은 실제 우리가 아는 장님과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을 의미한다면 넌센스입니다. 이 말은 즉, 다시 말해 정상적인 눈과 귀를 가지고 있음에도 얼마든지 알고자 하는 노력과 관심만 있다면 충분히 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비에 근접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는 의미의 전제가 이미 복음의 행간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예수님께서 모르실하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적인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수준으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전해주시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누구나 알 수 있는 주변 자연환경이라든지 현상을 이용해서 비유를 통해 그 비유 속에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그나마 알 수 있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의중도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뭔가 신비를 알 수 있는 사람과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어떤 운명적인 숙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원리와도 상반되는 원리입니다. 평등의 개념이 아니라 이미 차별이 전제됐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모든 것을 감안해서 판단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고자 하는 열의와 열망이 얼마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예전에 개신교에서 개최하는 성경암송대회 실황을 유튜브로 몇 편 봤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암송왕부터 80대 연로하신 권사님 같은 분들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성경 암송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 분들이 성경 암송 비법이라는 특별한 비법은 없지만 거의 대다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내 심비에 심겠다는 굳은 의지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의 지적인 실력도 어느 정도는 좌우를 할 수가 있겠지만 초등학교 4학년 같은 경우를 보면 이런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히나 지금 개신교 성경 같은 것은 우리 가톨릭 성경과 비교를 해보면 말씀 자체가 고어체 어투 형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 자체가 현대어로 순화가 되지 않아서 그것 자체도 조금은 어려운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본다면 오늘 복음 말씀이 좀 더 잘 이해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단순히 본다, 듣는다로 나오지만 굳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제 복음인가요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약간 영어를 인용하자면 see 와 watch의 차이를 설명해 주셨던데요 이런 차이도 하늘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 차이가 날 수 있을 여지가 충분히 많이 있습니다. 전자의 보다의 의미는 그냥 쉽게 말해서 눈이 있으니까 그냥 장님이 아니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볼 수 있는 상태의 의미를 말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근데 후자의 보다는 전자의 의미로 시작했다가 제가 좀 더 세부적인 뉘앙스를 말씀드린다면 점점 더 유심히 뭔가를 찾아내려고 하거나 또는 발견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유심히 관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경기를 보다고 할 때는 watch를 사용합니다. 저도 영어를 강의를 하면서 이것까지는 강의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굳이 당연하니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묵상글을 쓰면서 생각해봤습니다. 왜 원어민이 와치를 사용할까 말입니다. 경기가 뭐 자연을 구경하듯이 구경하는 그런 구경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승부가 있기 때문에 승부욕 때문에라도 아니면 야구 같은 경우도 하나의 게임이지만 지능적인 플레이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어떤 식으로 플레이를 하는지 그걸 눈여겨보는 것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이기 때문에 그냥 열린 눈이니 그냥 본다는 식의 그런 '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watch(와치)를 쓸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눈이 있어도 보는 사람이 있고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조금 더 통합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늘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일지를 생각하며 그 나라에 대한 간절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려고 하고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귀가 열려 있어서 듣는 hear가 아니라 와치처럼 뭔가 경청해서 주의를 다해 들을려고 하는 listen(리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기심 어린 눈과 같은 눈으로 뭔가 사물을 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니 당연히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땐 그걸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볼 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이라고 인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은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눈 있는 사람들은 볼 수가 있고 귀 있는 사람은 들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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