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강론과 말씀의 위력을 체험한 일입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25 조회수1,395 추천수0 반대(0) 신고

 

 

먼저 오늘은 어제 주일 마산교구보 주보 일면 강론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제목은 그분을 닮기 위한 길 --( 자비 ) ”입니다. 이 강론 원고는 지금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에서 사목하시는 유청 안셀모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강론 원고입니다. 강론 원고는 바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자비에 대한 강론입니다. 이 강론을 인용해주셨습니다. 그럼 한번 성인의 강론을 보시겠습니다.

 

혀로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찬양하며 조화롭게 한 하느님께 노래합니다. 혀로 우리는 날마다 다른 사람들과 말하면서 자비를 베풀거나 조언합니다. 그런 우리가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이 내 앞에 있는 동안 내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 (시편 39,2) 그대 앞에 뻔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대를 모욕하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을 합니다. 잠자코 있으십시오. “나는 말하였네. ‘내 혀로 죄짓지 않도록 내 길을 지키리라.’” (시편 39,2)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그가 말하게 두십시오. 그대는 조용히 듣고 있으십시오. 두 가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진리를 말하거나 아니면 거짓을 말합니다.

 

그가 진리를 말한다면, 당신이 그 이유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는 자비입니다. 그대가 듣고 싶지 않는 것을 듣는 동안, 그대를 아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행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그대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욕을 당해도 화내지 않을 때, 그 사람 때문에 슬픔을 느낄 때, 그대의 고통을 잊고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할 때, 그대는 성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비입니다. 그대를 위해 주님께서 길이 되셨습니다. “거만한 자들이 길 주위에 장애물을 놓았고 길 주위에 덫을 놓았습니다.” (시편 140,6) 그대가 덫에 걸리지 않도록 자비가 길이 되어 줍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사랑하면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맞는다면, 우리가 닮아가야 할 분은 하느님입니다. 그분을 닮아감은 처음부터 아름답게 새겨진 우리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강론 원고가 마무리됩니다. 그라츠 교구는 우리 마산 교구와 자매결연 맺은 교구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마 이번 원고는 이 신부님께서 올리실 차례라 보내오신 원고인 모양입니다. 어제 주일은 제가 사정이 있어서 제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습니다. 이웃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사실 자칫 잘못했으면 주일 미사를 궐할 뻔했는데 다행히 학생이 배려를 해 준 덕분에 주일미사를 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은혜로운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드릴 말씀이 결코 제 자신의 어떤 거룩함이라든지 이런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룩한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하느님 보시기에 정말 얼굴도 들지 못할 만큼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단지 그런 부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뿐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걸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런 저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제가 느끼는 하느님 사랑을 한번 간접적으로 체험하시는 기회가 되시고 이런 기회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이 과연 어떤 마음이실까를 한번 상상해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또한 이런 글을 통해서 제가 하느님께서 이런 마음이실 거라고 단지 추측과 상상을 한번 해보는 거지 이게 단정적으로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울러 알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이 자비와 용서인 줄 몰랐습니다. 원래 미사 전에 복음과 독서는 가능하면 미리 보고 참례하는데 어제는 어쩌다 보니 그냥 가게되었습니다. 사실 미사에 가기 전에는 제 마음이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여러 가지 오랜 고민 끝에 오늘 월요일 법적 조치를 취하려고 고민에 고민을 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들어가면서 먼저 주보와 교구보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 처음으로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예수님, 하느님, 어쩌자고 저런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인간적으로 이 세상에 저런 것도 사람이라고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십자가를 향해 질문을 드렸습니다. 사실 이 사람은 제가 한때 모셨던 학원 원장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아닙니다. 제가 서울에 있었을 때 창원에서는 정말 대단한 학원계에서 대부였던 사람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내려와 학원을 하면서 잠시 장유라는 지역에서 함께한 원장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분과 인연이 되었습니다.

 

몇 개원 전에 저에게 돈을 좀 차용해갔습니다. 어떻게 해서 삶이 상당히 어려워졌습니다. 차용해갈 때 정말 인간적으로 변제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인간적으로 정말 도와드렸습니다. 근데 최근에 변제하기로 약속한 날짜가 되었는데도 기간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급기야는 전화와 모든 문자를 차단하였고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때 알았습니다. 정말 세상말로 당했다는 걸 말입니다. 사실 제가 돈을 차용해 줄 때는 정말이지 반반이었습니다. 어쩌면 받지 못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예측한 상황에서도 제가 차용해 준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 한때는 제가 모신 상사였고 또 지금 오죽하면 그래도 자기 부하 직원에게 돈 이야기를 할 정도이면 오죽하겠는가 싶은 마음에 인간적으로 안 된 마음에 그래도 설마 지금 사정이 어려워서 그렇지 상환하지 않지는 안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만약 상환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는 그런 심정도 사실은 있었습니다. 전 이분이 용서가 되기 힘든 사정이 있었습니다.

 

돈 상환도 상환이지만 처음에 인간적으로 하소연하고 부탁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자기가 사실대로 자기의 지금 입장을 사실대로 말하면 제가 돈을 차용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해서 일명 세상 형법에 나오는 사기죄의 전형인 기망을 했던 겁니다. 저는 기망도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사정이 급하고 절박하면 그럴 수 있다고 그렇게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근데 더더욱 용서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이런 모든 거짓은 제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분이 차용할 시점에 저에게 자기 형제 심지어는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이용해서 저를 속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인륜적인 측면에서 차라리 속이더라도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런 사정에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이용해서 저를 속였다는 그런 사실이 인간적으로 용서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건 정말 용서를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분이 제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건 한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저는 제가 살면서 하느님께 엄청만 부끄러운 일도 있고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지만 나중에 하느님을 뵐 때 딱 한가지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건 제가 제 부모님께 제가 인간으로서 살면서 쏟은 정성만큼은 하느님께서도 감동하실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제가 살면서 부모님을 모셨습니다. 제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으니 제 부모는 아니지만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욕되게 하는 그런 모습에 저는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고 또 인간적으로 차라리 변제를 할 수 없는 사정이라면 용서라면 좀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전화를 받지 않고 피하고 차단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까지 최소한 인간으로서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연락을 취해달라고 하는 문자를 남겼는데 연락이 없었습니다. 어떤 연락이 없으면 저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법에 호소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사실 오늘 법적인 조치를 취할 마음도 있었지만 차마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제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대단한 신앙인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제가 가진 최소한의 신앙인이라는 양심 때문에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한 마음과 고민을 가지고 미사에 참례를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 따지는 건 아니지만 예수님께 하소연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잠시 하소연을 하고 나서 제가 교구보에 나온 일면 신부님의 강론을 읽었던 겁니다. 바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강론입니다.

 

제가 가진 그런 복잡한 마음을 이 강론이 순간 제 마음을 눈녹듯이 제 속에 있는 용서를 하기 힘든 제 마음을 녹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강론이 또 예수님께서 아니면 하느님께서 저에게 하소연하는 듯한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순간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 그 사람 용서하자. 이 돈 나에겐 정말 소중한 돈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벌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용서를 하기로 하는 마음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순간 신자는 아니지만 이 사람도 사람이니 하느님의 창조물 아니겠는가? 신자는 아니지만 이 사람도 하느님의 자식이라고 생각해서 용서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그 순간 이분을 향해 화살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용서라기엔 좀 뭐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 평생을 살면서 신앙을 가질지 안 가질지는 모르지만 신을 섬기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살면서 속죄하는 심정으로 살고 또 나한테 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좋은 일을 하고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화살기도를 하고 나니 완전히 제 맘 속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마침 신부님께서 강론하시는데 어쩌면 그 신부님의 강론을 듣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제 마음을 움직여 제가 어제 그 본당으로 가게 된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신부님 강론은 제가 따로 한번 정리를 해서 올려드려야겠네요. 지금 수업을 해야 돼서요. 그리고 미사 후 한 학생 수업이 있어 어제 늦게 집에 돌아와서 원래 이 내용을 한번 전해드리는 것도 간접적으로 남의 삶을 체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올리려고 했는데 어제 제 옆에 저희 본당 자매님과 같이 미사를 봉헌하게 되어서 이분이 너무 천사처럼 느껴져서 어제 제 상사 이야기보다 먼저 이 자매님에게서 받은 은혜를 올리드리고 이 이야기는 오늘 올려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그렇게 저녁을 늦게 먹고 쉬는데 하느님께서 마치 이렇게 저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 같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 느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야, 너 오늘 나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런 말 했지. 왜 저런 사람을 창조했느냐고 네 마음을 하소연하듯이 말했었지. 일단 먼저 네가 그 사람 용서하려고 마음먹은 거 잘했구나. 그럼 이제 내 말 잘 들어보렴.

 

지금은 너가 말한 대로 그 사람도 내가 만든 창조물이야. 네 눈에는 정말 세상에 살면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왜 그런 사람도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기는 좀 곤란한 사정이 있어. 그 이유는 우리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이야기해주마. 그건 그때 되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거야. 알겠니? 그런데 말이야, 이건 하나 너가 알았으면 해. 너가 그 사람에게 빌려준 돈 네가 생각하기엔 네 돈이라고 생각하지.

 

베드로야, 아냐. 물론 너가 일한 댓가로써 너가 정당하게 벌어들인 돈은 맞지만 만약 내가 말이지 너 학원 운영하지. 그럼 내가 만약 너한테 가려고 하는 학원생들이나 그 부모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너 학원을 가지 못하게 하면 너 어떻게 되겠니? 그런 거 한번 생각해 본 적 있니?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결국 나 하느님이 어떤 마음으로 조정하느냐에 따라서 너가 수입이 생길 수도 있고 수입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지.

 

그럼 이제 왜 그 돈이 네 돈이 아니라는 것 알겠니? 그 돈은 사실 내 돈이란 말이지. 잠시 너에게 흘러들어가 잠시 너가 내 돈을 유용할 뿐이라는 거야. 그러니 너가 그 돈을 네 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란 말이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너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단 말이야. 라고 마치 하느님께서 제 마음에 속삭여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제 마음이 용서의 마음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근데 이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원장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정말 미안하다고 하면서 인간적으로 하소연하는 내용으로 문자를 주셨습니다. 정말 이 문자를 확인하고 제 몸에 전율이 생겼습니다. 어제 이런 일련의 일이 하느님께서 하나의 교훈을 주셨고 또 제가 이런 걸 용서라는 표현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진정으로 용서를 하는 마음을 가지니 그런 마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런 제 마음을 그 원장님께 전해서 그 원장님의 마음에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를 할 수는 없지만 참 신기한 체험을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런 게 우연히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신앙인이니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저의 신앙체험을 올려드렸습니다만 제가 할 수 있는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 보니 제대로 잘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한번쯤 이런 케이스를 통해 이런 점도 타인의 신앙생활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부족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신앙체험 이야기이지만 조금이라도 은혜가 된다면 저로서는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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