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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2주일 해설+묵상>
작성자송영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7 조회수353 추천수2 반대(0) 신고
 

연중 제32주일


제1독서(1열왕 17,10-16)

과부가 제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갔다


엘리야는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시편(145)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제2독서(히브 9,24-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복음(마르 12,38-44 또는 12,21-44)

저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바쳤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또는 마르 12,41-44: 위 복음에서 괄호 ((  )) 안의 것은 생략할 수 있다.


연중 제32주일

독서․복음해설


제1독서(1열왕 17,10-16) 해설

과부는 자기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갔다


오늘 독서는 엘리야에 관한 부분(1열왕 17,1-2열왕 1,18)에 속해 있다. 그 부분에는 엘리야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일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 읽은 대목은 그 일화들이 시작되는 대목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불같은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오랫동안 가뭄이 들 것이라고 예고한 다음, 하느님이 지시한 대로 사렙타 지방으로 피신한다. 사렙타는 시돈 남쪽 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이방인 땅이었다. 사렙타로 들어선 엘리야는 과부 한 사람을 만나 먹을 물을 청하고 다음에는 먹을 것까지 청한다.

당시에는 보호할 사람이 없는 과부나 고아는 극히 생활이 불안정하고 궁핍했다. 그리고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취한다는 규정과 관습이 있기는 했어도, 흔히 형수의 생활까지 책임지지는 않고, 다만 후손이 없을 경우 후손을 보게 해 줄 뿐이었다. 따라서 자식 없는 과부는 시댁 가정이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지만, 자식이 딸린 과부는 다른 사람들이 보태주는 동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을 알고 나면, 엘리야가 자식 있는 과부에게 동정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염치없는 짓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과부가 자기와 자기 아들이 먹고 죽으려 했던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서슴없이 바친 사실은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작정한 순명에 비길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깡그리 바치도록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마지막 먹고 죽을 양식까지도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인류가 하느님의 요구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작정할 때, 하느님은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을 넉넉하게 주고 기쁨에 넘치게 해 주실 것이다.


시편(145) 해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이 시편은 히브리인들이 노래하던 ‘할렌’(찬미) 시편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착실히 지켜 올바르게 된 사회 안에서는 메시아 나라의 특징들이 빛난다. 그 사회 안에서는 천대받는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불의한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는다. 그 때문에 시편작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한다.


제2독서(히브 9,24-28)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려고

단 한번 봉헌되셨다


히브리서 8-9장은 더 큰 부분(5,11-10,39)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부분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영원한 사제직과 제사를 찬양하고 있다. 8-9장에서 저자는 구약시대의 전례들이 진정한 완성에 도달할 수 없었던 이유와 그리스도께서 당신 수난과 죽음으로써 바치신 제사만이 진정으로 사제적 봉헌이라 할 수 있는 이유를 지적한다.

9장 마지막 구절들로 이루어진 오늘 독서 대목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하느님과 완전히 합일되고, 경신례를 완성시키셨다고 말한다.

저자는 제위 지파 사제들이 바친 제사와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제사를 대조한다.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25-26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번 아버지와 완전한 합일과 친밀함에 도달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행동이 반복될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의 제사는 첫 번이자 마지막 제사이다.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구원 사업이 종결되는 마지막 승리만이 남았다.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일에 관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두 번째 오심’이란 표현은 대사제가 속죄하는 날에 지성소에 다시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하고 말한 표현일 것이다. 대사제의 두 번째 등장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표시로 간주되었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당신 제사가 완전한 결실을 맺었다는 마지막 표시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는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아온 모든 사람이 죄를 용서받았음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복음(마르 12,38-44 또는 마르 12,41-44) 해설

저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바쳤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독립된 대목이 나온다. 첫째 대목(38-40절)에서는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제시하고, 둘째 대목(41-44절)에서는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첫째 구절들에서는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이 보인 태도와 처신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율법에 통달하고 율법을 보호하고 있다고 자처하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자신 만만한 율법학자들을 단죄하신다.

그들이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다니면서 율법 전문가들로서 높은 위치와 신분을 인정받고 공적으로 인사 받으려 하고 회당이나 잔칫집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는 작태를 보고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가득 찬  허영과 거만을 질타하신다. 과부들 같은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은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신다. 그런 악한 짓을 일삼는 그들이 길게 기도한다 해도 그 기도는 위선일 뿐이라고 경고하신다.

41-44절의 짧은 대목은 40절에 나오는 ‘과부’에 대한 언급을 더욱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하여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끼워 넣은 것 같다. 위선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을 호되게 꾸짖은 다음, 예수께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헌신적인 과부를 칭찬하신다. 부자들은 뻐기면서 많은 돈을 내는 것 같아도 쓰고 난 나머지에서 남보란 듯이 내지만, 그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개를 넣었으나 그 돈이 가진 것 전부였으므로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바친 셈이었다.

우리 주위에는 뼈골 빠지게 일해서 쥐꼬리만 하게 번 돈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고서는 인정이 발동하여 따뜻하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가난한 과부처럼 없는 가운데서 자기 몸을 바쳐 서로 어우러져 살기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힘차게 오고 있다.


묵상


진정한 관대함인가 아니면 위선인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위선적이고 허영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과부는 서로 엄청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위선적인 율법학자들을 추상같이 단죄하고 헌신적인 과부를 극구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똑같은 현실성을 띠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도 예수께서 사정없이 질책하신 위선과 자기기만과 사기술이 판을 치고 있다. 입신양명과 뽐내고 으스대기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나라를 등쳐먹기가 당연한 것처럼 판을 치고 있다. 

우리는 한사코 객관적인 현상이나 현실을 부정하고 부인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공개하고 발가벗겨 만인 앞에 한 점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긍정적인 부분들을 발굴해낼 뿐 아니라, 부정적이고 반민중적인 요소들도 기탄없이 철저히 가려내서 비판을 가해야 하고,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배경과 원인을 밝혀내서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을 규탄하고 단죄하셨듯이 가식과 속임수를 뿌리까지 뽑아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과부를 극구 칭찬하셨듯이 이름 없고 가진 것 없고 당장 일해야만 입에 풀칠하고 그나마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안달하고 고민하는 수없는 사람들이 마음씨 착하게도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서로 상부상조하는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부각시키고 선전해야 한다.

하느님은 위선적인 율법학자들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중에서 남을 도울 줄 아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 역사를 힘차게 완성에로 이끌어 가신다. 하느님은 거대 자본가들과 부유한 나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다운 정을 잃지 않고 똑같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떳떳한 인권을 쟁취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 역사를 날로 새로이 창조해나가신다.

율법학자들은 창녀와 문둥이와 세리와 반신불수와 과부와 고아와 어부와 품팔이꾼 같은 변두리 천더기 인생들과 상종하고 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질색으로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몸소 고된 목수 생활을 하신 분으로서 그런 천대받는 인생들과 가장 친하게 지내셨고, 그런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동고동락하셨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 해서 박해와 고통과 수난과 치욕과 사형까지 당하셨다.

그 같은 천덕꾸러기들에게 바치신 예수님의 실천적인 동고동락과 자기헌신이야말로 진정한 관대함인 것이다. 자기 먹을 것까지 모조리 바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예수께서 바로 극도의 가난과 치욕을 겪고 가장 수치스런 십자가의 사형을 당하심으로써 참된 관대함이 무엇인지를 몸소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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