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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07 조회수638 추천수2 반대(0) 신고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요한 11,45-57)

 

 이 말은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돌아가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그 날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하였다.

 

                                     * * * * * * *

 

오늘 복음에서 가야파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한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는  죽음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비전이다.

 

즉 예수님은 그냥 살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비전을 갖고 살으셨는데 그 비전이란 모든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비전이다. 예수님은 이 비전을 위하여 사셨고 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비전이란 무엇인가?

첫째, 비전은 마음속의 구체적이고 분명한 그림이다. 지금은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실현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비전을 품은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그려 줄 수가 있다.


둘째, 비전은 가장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이다. 비전은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자신의 현실을 넘어서서 미래에 되고 싶은 가장 바람직한 모습과 관련이 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처럼 장차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가 비전을 품은 사람이다.


셋째, 비전은 가장 가능성 있는 꿈을 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때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우리 앞에 다가 온다. 바로 그 가능성을 보고 믿음으로 달려 가는 삶이 비전을 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넷째, 비전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거룩한 꿈의 다리이다. 몇 년 전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던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많은 인명 피해 외에도 성수대교를 통해 등 하교하던 학생과 직장인들, 그리고 성수대교 양쪽의 상인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다.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다리가 끊어져서 사람들이 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면 절망 속에 살거나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때로는 불만스럽고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꿈이 있다면 희망을 갖고 살아 갈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5,1-5)

 

비전을 품은 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품은 비전이다. 비전을 품은 자는 미래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 비전은 미래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신비스러운 힘이요,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비전은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현실의 다리를 뛰어 넘어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도록 하는 거룩한 꿈이고 열망이다. 우리에게 꿈과 비전을 품게 해주시는 주님은 어제의 꿈을 오늘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내일에는 현실이 되어가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비전을 제시해주러 오셨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죽으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죽는다"

라는 것은 예수님의 비전이고 그것을 위하여 죽으실 것이다.


세네칼은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죽는다. 인간은 죽는 것, 그것이 인간의 한계요, 운명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죽음을 없애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도록 제시해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즉 우리는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길을 걷지 말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구원이요 부활이라면 그것을 믿으면서도 그냥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이 곧 자살이다.

 

즉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가는 것이다. 분명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명으로 넘어가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자신의 목숨을 재촉하는 자살 행위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투신하는 것이다. 즉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겠다는" 당신의 죽음에 대한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는 것이요, 희생하는 것이다. 결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자살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런 비전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세운 비전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제시해준 비전이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 비전을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고 또 그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제시해준 비전을 예수님이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해 죽으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제시해준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전을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드리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또 자기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셨고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듯이 이웃을 위해 살고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죽는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살하지 않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또 나는 누구를 위하여 죽고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우리는 사는 방법도 예수님한테 배워야 하고 죽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로마14,8-9)

                                                                     -유광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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