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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 숨쉬는 영혼이 있을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27 조회수1,466 추천수0 반대(0) 신고

 

 

제 몸이 몹시 피곤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몸이 피곤하니 잠이 들지 않아서 그냥 지금 떠오르는 단상 하나 나누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라고 하며 제가 마음으로 딸이라고 하는 애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어제는 그 아이 어머니에게 제가 그 아이에 관해 문자를 하나 보내드렸습니다. 이제 아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네요. 방학 때 수업을 하려고 처음 봤을 때 제가 그랬습니다.

 

이거 어쩌지. 이젠 성인이고 해서 말을 높여야 할 것 같은데 하니 쌤 그냥 원래대로 해요 해서 그냥 예전처럼 말을 편하게 놓고 하다 보니 저도 그냥 마냥 지금도 애라고 쉽게 말하는군요. 아무튼 이 아이 어머니께 문자가 와서 다시 답장을 하려고 문자를 적는 도중에 뭐가 잘못 돼서 문자가 전송이 되지 않고 그냥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어머니 어떻게 잘못해서 문자가 사라져 지금 늦고 해서 내일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라고 문자를 보내드린 후에 어떤 묵상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이런 문자를 작성했습니다. 그 학부모님께요.

 

이 앞 전에 제가 그분께 그 아이는 제 딸이나 마찬가지고 제가 종교는 다르지만 하느님께 이 아이를 항상 잊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젠 문자에 이런 내용을 보내드리려고 했습니다. 이 아이를 제가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말씀드리려고요. 만약에 어머니, 애가요 만약 심장이 아파 어떤 사람의 심장이 필요하다면요 그리고 그 심장이 저 심장과 맞게 되면요 그리고 제 심장으로 살 수만 있다면요 정말이지 이 세상에 다른 어떤 누구도 심지어 제 가족한테도 줄 수 없지만 어머니 애한테는 제 심장을 줄 수 있어요.

 

그것도 고민도 하지 않고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자를 보내려고 했었습니다. 언제 한 번 제가 문득 제 자신한테 어느 날 혼자 그런 질문을 해봤습니다. 만약 애가 심장병이 걸려 내 심장을 줘서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질문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 애는 내 딸도 아니지만 근 십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하면서 든 정이 있는데 그 정도 그냥 정이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흔히 자식에게 쓰는 표현인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라고 하는 것처럼 저에게는 그 애가 그런 애입니다. 물론 제 딸은 아니지만요.

 

저는 이 애를 통해서 하나 느낀 게 있는데요 꼭 피를 나누어야만 자식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애가 몸이 아플 때는 제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정말 제가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을 정도이니깐요. 그런 마음이라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실제 그 상황이 되면 마음이 바뀔 수 있다고 말입니다. 왜냐면 생명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누구나 인간은 생명에 대해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게 당연한 본능이기 때문에 그런 말도 지극히 정상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인간의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초월할 수 있을 만큼 만약 사랑한다면 그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바로 멀리서 그 예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콜베 성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콜베 성인께서 바로 이런 길을 밟으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그런 상황에서 벗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일일 겁니다.

 

참 이런 것도 말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중요한 생명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사랑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걸 그냥 생각하면서 한 묵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게 더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실 제가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이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제가 제 심장을 이 애에게 주고 제가 죽고 이 애가 산다고 가정을 한번 해봤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저는 육신이 죽었어도 제 심장은 이 애 가슴속에서 뛰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심장은 생물학적으로는 하나의 인간의 장기이지만 이 심장이라는 장기는 영어로는 heart입니다. 고대 철학자는 심장은 하나의 사람의 영혼에 비유합니다.

 

이 단어는 마음이란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개념을 확장하면 영혼입니다. 결국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한 인간의 심장은 영혼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철학자들의 관점을 한번 생각해보니 사람은 죽었어도 이런 식이라면 다른 사람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영혼으로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런 묵상을 해봤습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가실 때 아마 지금의 제 나이에 하느님 품으로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참 신부님께서 정말 일찍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예전에 외국 신부님께서 인터뷰하신 걸 봤습니다. 지금 그 신부님 얼굴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신부님과 수단에서 같이 사목하신 분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이 많은 나를 불러가시지 왜 더 한창 하느님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젊은 신부를 데리고 가셨는지 하시면서 인터뷰하시는 걸 기억합니다.

 

그분의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참 이럴땐 하느님께서 정말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야속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인간적인 생각으론 그렇습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걸 저는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태석 신부님께서는 세상적인 나이로는 정말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도 참 안타까운 심정 금할 길 없습니다. 지금의 제 나이이니깐요.

 

저와 비교를 해봐도 이 세상에 하느님 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부님께서는 사제이시고 영혼 구원에 더 많은 일을 하실 수도 있고 또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의술로써 더 많이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달란트를 가지고 계신 거에 비하면 저는 정말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인생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분이 그렇게 이른 나이에 하느님 품으로 가신 거에 대해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만약 신부님의 삶을 이렇게 본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하느님 품으로 가신 후에 이 세상에서 신부님께서 남기신 물론 인간적으로는 사람이기에 부족한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사제로서 살아가신 그분의 고결한 삶을 본다면 그 분의 삶이 보여준 정신은 이 세상에 하나의 등불처럼 세상 사람들 가슴 속에도 훌륭한 가르침으로 살아 남아 있고 또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귀감이 되는 삶을 이 세상에 사시면서 보여주시고 떠났기 때문에 물론 이 세상에 신부님은 안 계시지만 그 분의 삶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하나의 훌륭한 삶으로 기억된다면 그건 육신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 분의 영혼은 이 세상에 그런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서 기억된다면 저는 이런 경우가 바로 죽어도 영원히 사는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그럼 반대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답은 간단하겠죠. 이 세상을 살아도 가치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몸은 살아도 정신이 죽은 마치 산송장과 같은 삶을 사는 것과도 진배없다는 묵상을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을 이렇게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에 있는 시간 동안 그 시간은 물론 하느님께서만 아시겠지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선용해서 살아 이 세상에 존재하시지 않으시면서도 그분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이런 삶을 사는 게 정말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값진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말이 참으로 지루한 이야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한번 이런 것을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비록 그분의 삶은 짧았지만 그분의 정신은 죽지 않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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