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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자 신학 [신 민중 신학 / 껍데기는 가라]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1 조회수350 추천수1 반대(0) 신고
 
 
진정 가난한 편 <과> 거짓된 가난한 자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선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지 상기해 보아야 한다. 인간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념들과 사상, 철학만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설 수 없다. 입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머리로서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진정 가난한 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과하고 있는 점들이 있다.
 
세상 사람들의 무수한 이론과 이성들은 진정 가난한 편에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배부른 돼지의 근성, 아니면 숨겨진 탐욕을 안아 주는 자신들에게 미소 지으면서 다가오는 "정치적 동물" (누군가의 글에서 인간을 표현) ... 자신들과 연대해서 인간과 싸우고자 자기 입에 독설을 품는게 가난한 편,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에서 언급하는 ''마음(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는 다르다.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었기 때문이다는 논리는 ''세상의 논리'' 이다.이를 없애고 유토피아적인 세상을 지상에 세우고자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고, 교회와 신앙을 악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동물"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거짓된 가난한 자''들 편에 서지 않는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악용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역시 예수님처럼 이런 ''가짜들''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내어 주는'' 부유함을 일러 준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내어 주는'' 충만함을 일러 준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가지려고 하면 더 가난해 지고 내어 주려고 하면 더 풍요해 지는 ''사랑의 논리''를 세상 안으로 민중 안으로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실천적 신앙인 것이다.
 
더 가지기만을 바라는 가난한 자들은 마음(영혼)이 가난하지 못하여 불행하다. 내어 줌으로써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더 풍요로와 지는 마음(영혼)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 이들은 "정치적 동물"들에게 악용 당하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그리스도)에 참으로 참여(일치)한다. 이들은 '사랑의 모상'이다. '참된 사랑'(인간주의적 사랑이 아닌, '하느님의 십자가 사랑'을 수신)은 이들로 인해서 세상과 민중은 새롭게 다시 빛나게 된다.
 
 
새로운 민중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단지 욕심이 없는 ''정지된 상태''의 가난한 마음이 아니다. 비록 빈곤하지만 "내어 줄 수 있는" 실천적 가난한 마음 (진정 가난한 편이다)을 지닌 새로운 ''사랑의 민중''(사랑의 모상)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기 해방''을 "자신을 내어 주는" 적극적인 가난을 통해서 성취하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과 결합함으로써 ''완전한 가난''을 이룬다. => 이를 가난한 자 신학 [ 신 (새로운) - 민중신학 ]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부자들에게만 사랑의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빈자들에게도 사랑의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의 의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인 것입니다. 빈자들은 오직 사랑만을 먹고 사는게 아니라, 빈자들도 사랑을 나눌 수 있서야 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약자이지만 영적으로는 강자에 가깝습니다.
 
빈자들에게 '정의'만 알려 주는게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빈자들에게 '사랑'을 알려 주는게 그리스도의 힘이다고 봅니다. 그동안 어떤 분들(00단 포함 /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않으면 -그리스도 오심을 반대 - 무죄한 아기들을 살해하는 헤롯과 같아진다)은 빈자들에게 '정의'만을 중요한 듯이 그렇게 심어왔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생명의 씨앗은 '사랑'입니다.
 
빈자들이 자신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닐 것입니다.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약자의 상황 아래에서도 "새로운 기초" , 그리스도의 새로운 토대를 이루어 갔습니다. 그들의 사랑의 실천(순교의 정신)은 오히려 주위의 각성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빈자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이며 빈자들은 '정의'로 투쟁해야 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랑'으로 극복해 가야 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빈자들을 '정의'의 '수단화'로 변질시켜 왔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빈자들은 다시 사랑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빈자의 삶을 '자기 해방'(타인에 의한 해방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해방)으로 성취해 내어야 합니다. 가난한 약자, 빈자들은 '정의'에 동원되어 가는 도구가 아니라 도리어 '사랑'을 실행할 수 있는 실존적인 '강한 실재자'로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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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래 교회의 [ 사랑 활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 ]이 일어났고, 곧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 사랑의 활동이 아니라 정의 ]라고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수한 주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 사랑의 활동 ]은 실제로 부자들이 '정의'를 위하여 일할 의무를 회피하고 양심의 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 그들(부자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 베네딕토16세 교황님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회칙 중에서 >
 
 
"세상에 가득찬 불평등에 대한 한층 더 예리해진 의식은 그 자체가 모순과 불균형을 낳고 또 심화시킨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고 인간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었습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문헌, 사목헌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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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지 하느님과 거지 예수님 >
 
빈자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
사랑의 십자가
참 가난한 자들의 해방과 부활, 참된 자유를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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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인간을 드러내 보이시는 그리스도"

  '인간 계시'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는 '인간 계시' 이다. 세상 안에서 인간이 바뀌어지는게 아니라, 인간 안에서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제도)보다 먼저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고찰해 보지도 않고 오직 '인간적인 제도'만을 근원적 문제로 삼는다.

"인간 계시"의 그 인간의 모습은 '아담적 인간'(인간중심의 패러다임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인간'(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흙의 인간이 아닌, 하늘의 인간이다. 인간 중심의 옛 인간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인간, '인간에 대한 계시'인 것이다.

인간중심으로 여러 종교, 사상철학, 밀교 등으로 '성형된 제도적 인간'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인간을 밝혀 주는 것이다. 성형된 인간은 "쇄신'에 대해 빛이 되지 못하고 어둠만을 남기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제도(세상)에 따라 '성형되어지는 인간'으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진리, 교회 가르침의 인도(지도)에 따라 '위로부터 난' 새 인간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그 자신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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