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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8) 부활 - 눈부신 사랑의 세계/ 전 원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06 조회수656 추천수5 반대(0) 신고

 

엊그저께 촉촉이 내린 봄비 때문일까, 명동 교구청 앞마당의 나무에 푸른 기운이 돌고 있습니다. 회색빛 도시 한복판에서 그나마 몇 그루 나무가 서 있는 덕분에 계절의 변화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비록 희뿌연 콘크리트 숲 속에 둘러 싸여 살고 있지만, 우리 교회의 전례력은 절기와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서 성가 소리만 들어도 계절의 변화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중 부활 시기는 땅 위의 생명이 약동하고 온통 세상이 꽃으로 만발하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누군가, 식물은 그 안의 생명 에너지가 최고로 충만했을 때 꽃으로 터져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 계절에 맞이하는 주님 부활은 세상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온통 충만했을 때 터져 나온 황홀한 기쁨과 환희가 아닐는지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이 황홀한 체험은 스승 예수의 충만한 사랑을 깨달은 사건, 그 사랑의 세계를 힐끗 본 사건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연한 기회에 소설 '빨간 머리 앤'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몽고메리(1874-1942)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오솔길에 적혀 있던 몽고메리의 짧은 단상인 듯한 글은, 저에게 이런 부활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늘 내 삶의 모든 평범한 순간 속에서도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가 바로 곁에 있고

그 세계와 나 사이에 얇은 베일이 가려져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 베일을 벗겨서 치워버릴 수는 없었지만

때로 한 자락 바람이 불어와 베일을 펄럭였을 때

그 너머의 황홀한 세계를 언뜻 보았습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일별이었지만,

그 후로 늘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이 발현하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이렇게 인생의 우여곡절 바로 한 겹 너머에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 사건입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친 뒤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찬란한 태양처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내 삶 너머에 영원한 그 무엇이 있음을 감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온갖 비유와 행적으로, 결국은 처절히 돌아가시면서까지 알려 주고 싶어하셨던 그 세계....... ,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목격한 베드로가 그 눈부신 아름다움 앞에  '주님, 저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지어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외치던 그런 세계와의 만남 말입니다.

 

부활 사건은 70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것, 오직 세상에 믿을 것이라고는 내 몸뚱어리밖에 없다는 웰빙(well-being) 시대의 허구를 폭로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 내 귀에 들리는 소리, 내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한 겹 그 너머에 '눈이 없어도 보이는, 귀가 없어도 들리는, 손이 없어도 느껴지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 세계는 저 멀리 죽어서나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우리 삶 가장 가까운 데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른 기쁨,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른 행복' 을 사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공과 부(富)를 추구할 때, 시류를 거스르며 조용히 가난과 겸손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에게, 나의 존재가 그들의 삶에 축복이 되어 주고 소리 없이 떠난 빈자리에 그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순전한 마음 안에 있고, 순결한 사랑 안에 있고, 욕심 없는 빈 마음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텅 빈 무덤 하나 남기셨듯이, 나를 남김없이 비워낸 내 인생의 텅 빈 자리.

그곳에서 우리도 언뜻 몽고메리가 보았던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세계를 볼 것만 같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텅 빈 무덤에서 터져 나왔던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것만 같습니다.

      <말씀지기의 '편집자 레터'에서ㅡ 전 원 신부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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