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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을 읽고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03 조회수1,121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말과 관련해서 또 남의 허물을 먼저 보기보다는 자신의 허물을 먼저 봐야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과 어우러져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신부님께서는 묵상 이야기의 포문을 신학교 시절 일상의 이야기로 열어셨습니다. 동창신부님의 회장출마 연설에서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서 이사야 예언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인용하여 지지연설을 하신 덕분에 동창신부님으로부터 식사 대접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시는군요. 모르긴 몰라도 동창신부님께서 회장에 당선되셨을 것 같습니다.

 

일단 신부님의 말씀 전개과정을 유추해보면 그렇습니다만 이건 확실하게 모르는 사실입니다. 혹 아마 낙선하셨어도 수고한 대가로 또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깐요. 운동신경이 없다는 말씀과 지금 이런 일련의 사건이 정말 저와 너무 흡사합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사례가 있다는 말씀에 혹하셔서 신부님들 앞에서 발표를 하시게 된 사연에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사례에 혹하셔서 라는 말씀에 말입니다. 이때에도 신문에서 평소 봐두신 한시를 적절히 인용을 하셔서 하신 모양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교육담당업무를 하시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례를 보면 신부님께서 평소 가지고 계신 일상의 습관을 한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언어 즉 말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시고 또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냥 단순히 흘려 지나치시는 그런 게 아니고 유심히 관찰하시면서 사물을 예리하게 보시는 그런 눈썰미를 가지고 계시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보게 됩니다. 그건 제가 지금까지 신부님의 묵상 글을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한 달 반 정도 이 사이트에서 신부님의 묵상 글을 읽어본 느낌을 보면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네요.

 

이 부분을 한번 보면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한 단면을 보시고 그걸 다른 것과 유추해서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시는 신부님만의 독특한 달란트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오늘 신부님의 동창신부님의 지지연설을 하신 연설문 내용을 소재를 포착하시고 그걸 연설문 글감으로 배치시키신 부분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은 신부님과 저는 감히 신부님과는 비교를 할 수 없지만 아주 아주 조금 비슷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분의 하나가 바로 말입니다.

 

말을 통해서 서로 대화를 한다든지 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감정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말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기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이 잘못 해석해서 그 상대방이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고요 또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말 표현력이 부족해서 의도와 달리 또 상대방이 잘못 오해를 할 수도 있고요, 역으로 정말 이런 케이스는 잘 있지는 않지만 설사 말하는 본인은 잘못 표현을 했지만 듣는 상대방이 오히려 제대로 말을 전달하지 못한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이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세상에서 이럴 때 사용하는 표현이 말을 개떡 같이 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서로 대화를 할 때 정말 잘 해야 하고 또 주의를 해야 하는 게 두 가지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먼저 말을 하는 입장에선 자신이 말을 할 경우 상대방이 혹 잘못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한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서 상대방이 잘못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모두 완벽한 말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은 제대로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약간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요 자신도 사람이라 완벽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정말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게 자신이 실수로 또는 착오로 잘못 알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사실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서로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오해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상대방 입장에서도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이 정말 진실과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렇지 않을 경우입니다. 먼저 진실과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상대방은 진실과 사실을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본인이 잘못 이해를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말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그 말을 듣는 상대방 입장에선 자신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정말 말한 사람 입장에선 그런 사실을 상대방으로부터 듣지 않게 된다면 자신이 남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하는 그런 일도 있는 경우를 저는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실제로 경험한 적도 있고 또 주변에서 그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보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우리는 정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에 정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가령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냥 단순한 일은 만약 서로 오해가 있었다면 서로 대화를 통해서 얼마든지 감정의 골을 해소할 수 있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정말 다르게 봐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쩌면 한 사람의 영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서 급기야는 한 영혼을 죽일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번 이런 일이 있다고 상상을 해보죠. 자신은 살면서 전혀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나중에 하느님 대전에 갔을 때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을 다 보여주시면서 자신이 남에게 준 자기도 모르는 상처를 보여주시게 된다면 얼마나 난처하고 난감한 상황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도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에 개구리는 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구리를 죽이려고 하는 의도는 없었는데도 결과론적으로는 개구리가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이렇게 개구리한테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우리가 살면서 무심코 던지고 내뱉는 말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본다면 정말 우리가 평소 하는 말에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자칫 잘못하면 한 영혼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장구하게 적은 것은요 평소 우리는 말의 중요성과 말이 정말 미치는 중요성과 파급효과를 알고는 있지만 사실 그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 기회를 통해서 제가 평소 생각했던 일을 한번 여러분과 공유를 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에 상당히 지루하지만 길게 적었습니다. 성경과 세상 말에는 말에 관한 엄청 주옥 같은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말은 성경을 통해서 또 격언을 통해서 한번 보시고요 저는 끝으로 흔히들 세상에서 사용하는 말 표현 하나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우리는 말을 무수히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또한 이 말 때문에 때로는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또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잘 한번 생각해보면 그런 것의 근원을 분석해보면 사실 아주 사소한 오해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썰렁한 표현이지만 한번 생각해보시면 나름 의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해가 다섯 개 모이면 오해가 됩니다. 일해가 두 개 모이면 이해가 됩니다. 사해 다음이 오해입니다. 이런 공식을 우리의 감정에 한번 대입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를 못하고 또 이해를 못해서 사해가 되고 이 사해를 넘어서게 되면 그때는 오해로 이어지게 됩니다. 근데 우리는 오해할 수 있는 사정이 있다고 해도 한 걸음 양보해서 물러서면 오해에서 사해가 됩니다. 근데 이 사해는 상대방 입장에 놓여서 상대방을 한번 이해하고 또 한번 더 이해하게 되면 사해가 됩니다. 저는 이때의 사해를 사랑으로 바꾸어 표현해보겠습니다.

 

오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면 어쩌면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한 걸음 더 물러서면 사랑할 수 있고 또 잘못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억지 같은 표현을 사용해서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이 한 걸음의 자신의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상대방을 오해를 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썰렁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주일 하느님 축복 많이 받으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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