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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부활성야 | 주일 및 대축일 강론 ).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21 조회수350 추천수6 반대(0) 신고

 

부활성야 | 주일 및 대축일 강론

 

우리는 어두운 밤에 촛불을 밝혀 들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요한복음서(1,4)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약한 촛불 하나를 손에 들고, 우리의 인생길에 가냘프게 그러나 확실하게 밝혀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하느님이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부활은 몇 사람을 놀라게 한 기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일을 죽기까지 실천한 한 생명을 하느님이 당신 안에 거두어들이신 사건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거두어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던 것과 달리 믿고 있는 예수를 미워하고,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유대 군중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세상만방을 지배하게 해주는, 화려하고 막강한 메시아가 아니라서 그들 지도자들의 미움에 동조하고 죽임에 가담하였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는 데에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는 예수라서, 유대민족에게 영향력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 앞에 그분을 버려두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쳤던 하느님은 없다고, 사람들은 그분을 비웃었고 조롱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불렀지만, 하느님은 침묵을 깨고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 당하는 죄수의 한 사람이 되어, 그분은 고독 가운데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하느님만이 당신의 미래라는 사실을 그분은 굳게 믿고, 죽어 가셨습니다. 하느님은 과연 그분의 미래로 살아 계셨습니다. 인간이면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심연을 넘어서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외면하지 못하는 죽음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등지고 외계인(外界人)과 같이 혹은 천사와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버렸노라고 말하기에는 이 세상에 너무나 얽혀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로 살면서 죽음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촛불 하나를 받아들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촛불 하나를 받아들고, 예수님을 나의 빛으로 삼고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우리가 장차 죽으면 사람들이 우리의 주검 앞에 제일 먼저 촛불 하나를 밝혀 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빛을 좇아가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듯이, 우리는 울며 웃으며 땅에서 삽니다. 그러나 오늘 밤 우리 손에는 촛불 한 자루가 들려 있습니다. 그냥 웃고 그냥 울며 살지만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우리의 삶 안에 밝히고 살겠다는 마음다짐을 담은 오늘의 촛불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서의 이 말씀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하는 마음다짐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명, 그분이 사신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던 그분의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죄를 많이 지었다고 유대인들이 외면하던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루가 7,48). 죄로 인하여 벌로 병을 얻었다고 유대인들이 믿던 중풍병자에게도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마르 2,5). 우리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보복하기를 원하기에 하느님도 보복하신다고 상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술궂기에 하느님도 심술궂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선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고 가르치면서, 그 선하고 불쌍히 여기는 생명을 당신이 몸소 사셨습니다.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지혜를 자랑하지도 않으셨고, 당신의 권위를 과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고 과시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를 평가하며 하신 유일한 말씀은 “나는 그대들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있습니다.”(루가 22,27)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측은히 여겨서 섬긴 분이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이제 죽음은 절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는 미워하고 외면해도, 우리의 노력이 실패하여도, 이제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면, 그런 절망들 안에 새로운 생명의 빛이 보입니다. 예수님도 겪은 미움입니다. 예수님도 체험한 실패와 고독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로마서는 그 실패와 그 고독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6,8) 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넘어서 예수님은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만물이 뿌리박은 이 땅, 우리가 장차 묻힐 이 땅도, 이제 그리스도의 빛을 간직하고 있게 하였다고 사도신경은 고백합니다. 용서가 실천되는 땅에 그 빛이 보입니다. 약한 자를 돌보아주고 그들의 불행을 퇴치하기 위해 일하는 섬김이 있는 땅에 그 빛이 보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생명을 불쌍히 여기며 돌보는 섬김이 있는 땅에 그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신 흔적들을 간직한 땅입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이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발생합니다.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발생합니다. 자기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발생합니다. 실패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고, 고독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사랑의 순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에 스며들고, 그 빛으로 실천들이 나타나며 보이는 새로움입니다. 어둠의 역사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지금부터 촛불을 밝혀 들고 우리가 세례 때 하였던 약속을 새롭게 합시다. 우리 안에 또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안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실 것을 기도드립시다. 우리가 사는 역사의 어둠 안에 그분이 빛으로 함께 계실 것을 기도드립시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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