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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카인과 아벨[14]/위대한 인간의 탄생[37]/창세기[52]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17 조회수350 추천수1 반대(0) 신고

왜 하느님은 카인이라는 살인자를 내팽키지 않으시고 살려두기로 하였을까?
그분에게는 다 그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르는 그분 특유의 것이리라.
믿는 이는 언제나 개인의 성화(聖化)를 통해 모든 영광을 하느님 그분께 돌리지만
믿음을 떠난 이,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이는 제 잘난 멋에 그 영광을 독차지한다.

사실 마치 그것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라고 그들이야 믿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교묘히 그것들을 관리하고 움직인다.
그게 그분의 목적이다.
그 목적을 제 잘난 맛에다 허영까지 업고 덤벙이는 믿지 않는 들뜬 이는
알리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언제가 세월이 흐른 후
그들도 하느님의 그 원대했던 숨은 그 목적을 이해하리라.
 

항간에 유행처럼 번지는 것 중 죽을 때 몇 가지 후회하는 대목 중에는 이 믿음에 대해
꼭 비빔밥의 참기름처럼 끼이는 게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살아생전 신앙을 갖지 않은 게 가슴을 칠 지경으로 후회스럽다나.
그렇지만 그 후회도 잠시뿐이다.
그 아쉬움을 끝으로 그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갈지 모른다.
후회에 담긴 회개가 그를 그곳으로 초대하리라.
그건 하느님 그분만이 아는 그 무언가의 룰에 따를 것이다.

그만큼 신앙이란 믿음은 모든 이의 관심사다.
여기에 믿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는 없다.
믿는 것은 다 같다.
그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나냐 남이냐 이다.
그 남을 창조주 하느님께 두는 자가 진정 믿는 자이리라.
수많은 창조주라고 다들 떠벌이지만
삼위일체이신 그분만이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다.
 

누군가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나부랭이를 틀지만
믿음은 한 처음 그분과 함께 그렇게 있었다.
그분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분 그 자체이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 해도 그분은 그림자처럼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다고 믿는 약한 자이다.
간혹 어처구니없는 낭패를 당할 때 우리는 하소연한다.
‘어찌 이럴 수가!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라며 하느님의 존재를 부르짖는다.
이런 우리가 자만심으로 그 곁을 떠나는 게 죄를 짓는 것이다.
자기도취에 빠져 허영심으로 그분을 깔보는 게 타락한 패륜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카인도 사실 이 범주를 벗어나질 못했다.
그는 하느님과 늘 함께하면서도 그분을 떠나있었다.
그분 눈 밖에 난 사람이었다.
홀로 그 어려운 삶을 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나 쫓기는 몸이었다.
그분께 다가 갈려 해도 이미 갈곳까지 간 후였다. 
 

그는 결혼했다.
누이인지 누이 동생인지는 잘 모른다.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는 여전히 불안, 초조, 공포에 억눌려있었다.
지금이야 그 흔하디흔한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성읍을 세웠다.
소위 말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살인자 카인은 이렇게 첫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문명 생활의 시조로 자리매김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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