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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비의 또 다른 이름 , 배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2 조회수1,750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저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당 내부에서도 더군다나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더더욱 자비를 실천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실천하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이 있을 때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하지만 그 가르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게 모른다면 그냥 한낱 허공의 메아리처럼 공허한 가르침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자비라는 말씀이 너무 광범위한 의미로 해석되어 진다면 자비를 실천하고 싶어도 실천할 수 없는 면도 없지 않아 저는 자비의 또 다른 쉬운 개념이 무엇이 있을까 해서 한번 고민해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이건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사견이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자비라는 거창한 말씀 이전에 저는 먼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배려라는 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배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먼저 배려라는 말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배라는 말은 나눈다는 것입니다. 분배 배급 이런 말에 붙는 배입니다. 려는 생각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말에 고려해본다 또는 그 사람은 사려가 깊다 등등 즉 생각이 깊다와 같이 려라는 말은 생각을 뜻합니다. 그럼 배려의 순수한 기본적인 의미는 생각을 나눈다는 의미라고 보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우리는 또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제 3자의 입장에서 공손한 표현으로 말씀을 나눈다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사용하는 말을 잘 살펴보면 말이라는 것은 먼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게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말 속에는 우리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말이나 대화를 하는 것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려라는 말 속에는 생각을 나눈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생각을 나누려면 상대방과 소통할 때 장애물이 없어야 순조롭게 생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제 각기 자기만의 개성이 있기에 자기만의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는 나와 타인의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전제하에 타인의 생각과 나의 생각 사이에서 생겨나는 차이가 생기는 거는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런 차이를 좁혀가는 게 바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며 그 출발점에서부터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이 일어나는 것일 겁니다. 결국 배려라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생각한 후 그 생각대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게 배려가 되는 것이겠죠.

 

즉 다시말해 역지사지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남을 배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과부사정 홀애비가 안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한 번 생각을 해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전범의 책임자를 추적해서 전범 재판소에 세워서 재판을 했을 때 그 전범 자신은 상관의 명령에 의한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서 자신의 무죄의 변론을 주장했습니다.

근데 이 재판을 지켜본 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철학자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당신의 죄는 많은 유태인을 살인한 살인죄가 아니고 타인의 삶을 공감하는 공감능력이 없다는 게 죄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이 말 속에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철학자가 전범 책임자에게 말하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세상적인 법에 의해서는 무죄의 논리를 주장할 수 있으나 인류애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 이 시대는 과거와 달리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혼자서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남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과 공감하지 않은 것을 일종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며 서로 생각을 나누며 공감한다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계산해보면 당연히 힘이 분산될 겁니다.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당연히 나누면 힘이 적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배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영어이지만 요즘 현대사회에서 많이 쓰는 단어 중에 씨너지 효과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원래 시너지는 씬이라는 영어 즉 합성한다의 의미와 에너지라는 힘이 합쳐서서 생긴 단어입니다. 이 뜻은 자연적인 법으로는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되지만 시너지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말 그대로 셋도 될 수 있고 아니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바로 시너지 효과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처럼 상대를 위한 배려는 상대와 함께 그 사람과 생각을 나누지만 힘이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감할 때 더 많은 힘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카페 활동을 하면서 한번은 제가 웃음방에 재미난 내용을 한번 올려보려고 하던 차였는데 글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요즘같이 각박하고 정서가 메마르고 딱딱한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한번씩은 잠시 좋은 유머가 있다면 한번 웃고 넘어가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을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그 시점에 글을 쓰려고 하는데 마침 그때 한 자매님의 가슴 아픈 글이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려고 하는 좋은 의도로 글을 올린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 자매님께서 그 글을 보신다면 분명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웃음을 줄 수 있는 것은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분이 다른 내용으로 웃음을 줄 수 있기에 그 대상이 굳이 아무리 한 형제이더라도 그 글이 한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글을 올리지 않는 게 진정한 형제애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비유처럼 예수님께서는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그렇게 동분서주하시며 애쓰시는 걸 보면 이 길을 가는 저희도 예수님을 본받는 자녀가 되어야 하기에 마땅히 어떤 형제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한 거죠.

 

사순시기에는 자비와 자선을 많이 강조합니다. 사순이 아니더라도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겁니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자비를 베푸실 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에 나오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입니다. 즉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입니다.

 

그 측은지심은 바로 상대를 나와 너로 분리시키면은 나올 수 없는 마음입니다. 바로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다 라고 하는 일치의 마음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비도 나 자신이 상대와 공감을 나눌 때만이 그게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동양의 맹자도 인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측은지심에서 나온다고 언급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 자기 주위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진정한 자비의 마음이라면 그 어떤 용서도 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만약 이렇게 한번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자비롭게 용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희가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해본다면 그 상처를 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좋은 생각과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영혼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살아가는 걸 보고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그 영혼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을 가진다면, 오히려 너무나도 가련하고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에 그 영혼을 위해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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