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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 신성을 취하신 하느님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2 조회수1,195 추천수0 반대(0) 신고

 

 

새벽에 잠시 잠에 깨여 정신이 맑지 않은 상태에서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골고타를 오르시는 주님의 모습이 바로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순간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걸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저의 상상입니다. 제가 상상의 눈으로 예수님을 뵌 걸 말씀드립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 상상 속에서 신성의 하느님과 인성의 하느님을 상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인성과 신성을 둘 다 가지고 오셨습니다.

 

인성을 가지셨기에 저희 인간의 나약함도 실제로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실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지 않으셨어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인성을 취한 우리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라는 걸 아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물론 아시지만 그냥 아시는 단계에서 머물지 않으시고 몸소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지만 정말 당신께서 직접 피부로 인간의 인성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경험하고 싶어셔서 그리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약한 인간을 이해하시려고 인성을 취하셔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아들로 오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아무리 저희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지만 그냥 보내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떤 안전장치를 하고 보내셨으리라고 저는 한번 상상을 해봅니다. 그 안전장치가 바로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의 모습에다 신성의 하느님을 덧입혀서 이 세상에 보내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인데 만약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찌 되겠습니까? 물로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상상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인성의 하느님과 신성의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죽어 마땅한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입도 열지 않고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인성을 취한 모습을 지니신 모습을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정말 가엽고 불쌍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그 고통을 참아내기가 정말 힘들고 정말 말할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모습은 항상 상상을 해온 모습이지만 오늘 잠에서 깨였을 때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또 다른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의 아들로 성자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근본 속성은 하느님의 속성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시 않겠습니까?

 

저는 이런 신성의 하느님께서 그 당시 골고타를 오를 때 우리는 피땀이 범벅이 되어 골고타를 오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 모습을 또 다른 각도에서 직접 하느님의 신성을 취하신 하느님이신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분은 아마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오르는 아들과는 다를 겁니다. 아마 저는 이때 신성을 취하신 하느님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하느님은 환희의 눈물로 기쁨이 넘쳐흐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도 오셨지만 또 하나는 또 다른 하느님의 모습으로 즉 인간의 모습을 지닌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입장에서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오로지 예수님은 아버지 성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이 이 세상에 파견되심을 아시기 때문에 인성을 취하신 아들 예수님도 마지막에 성부 하느님께 말씀드렸듯이 정말 하느님께서 맡기신 잔을 피하고는 싶지만 그게 아버지의 뜻이라면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한번 헤아려본다면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도 그런 고통을 피하고 싶고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드릴 때 이미 피땀을 흘리셨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어땠습니까?

 

물론 두렵지만 그 두려움도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성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뜻을 순순히 아버지의 뜻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이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골고타를 오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성을 취하신 부분에서 봤을 때를 상상을 해보면 저는 그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성부 하느님께 이런 고백을 하시면서 오르셨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십시오. 아버지께서 이 세상 죽어가는 이 죄인들을 살리시려고 저에게 이런 엄청난 죄인들의 죗값인 십자가를 제 어깨에 짊어주셨는데 어찌 아들의 이런 고통을 지켜보시는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버지, 걱정하시지 마세요. 저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시는 아버지께서 분명히 저의 이런 고통을 지켜보시고 눈물을 흘리실 거라는 거 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이제 조금만 제가 참고 올라가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 세상의 죄를 제가 지금 다 짊어지고 가는데 조금만 더 오르면 목적지에 다 오르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제가 중도에서 포기할 수 없도록 지쳐서 쓰러지지 않도록 부디 힘을 주시옵소서 하시면서 성부 하느님께 고하면서 오르셨을 거라고 한번 상상을 해봅니다.

 

이때 성부 하느님께서는 대견하구나,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 아비의 마음을 알아주니 정말 고맙구나 하시면서 아들아, 조금만 참고 더 인내해서 마지막까지 견뎌서 이 세상의 죄를 다 나에게 넘겨주고 이 세상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라고 격려하셨을 거라고 상상을 해봅니다.

 

아들 예수님은 이런 아버지의 격려에 힘을 얻어 멸망의 길을 걷는 이 세상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완성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인성의 하느님은 고통스럽겠지만 신성의 하느님은 불쌍한 영혼을 수렁에서 구해 살려내시는 일이라고 생각하셔서 그 일이 완성될 거라는 희열의 기쁨을 느끼시며 드디어 마지막 최후에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실 때는 정말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냈습니다. 아버지 하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가시지 않았을까를 한번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모습을 지켜본 백인대장의 고백이 바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인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저는 제가 한 상상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조금 이런 상상을 해보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자신이 상상하고 뭉클하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긴 합니다만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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