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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부활 제3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15 조회수2,150 추천수0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며,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27ㄴ- 32.40ㄴ- 41

그 무렵 27 사도들을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사도들에게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0(29),2와 4.5-6.11-12ㄱ과 13ㄴ(◎ 2ㄱㄴ)

◎ 주님, 주님께서 저를 구하셨기에, 제가 주님을 높이 기리나이다.

○ 주님, 제가 주님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께서는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주님께서 제 목숨을 저승에서 건지시고,

저를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

○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거룩하신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주님의 호의는 한평생 가니,

저녁에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환호하게 되리라. ◎

○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가 되어 주소서.”

주님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셨으니,

주님 저의 하느님, 제가 주님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 ◎ 

 

제2독서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5,11-14

11 나 요한은 어좌와 생물들과 원로들을 에워싼 많은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백만 수억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 알렐루야.

○ 만물을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인류를 어여삐 보셨도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9 또는 21,1-14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요한 21,12-13 참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먹어라.” 하시며,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셨도다. 알렐루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사도 5,27ㄴ-32.40ㄴ-41) 해설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증거한다>


모세와 같으신 예수님: 의회 앞에 선 베드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베드로는 특히 모세에게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청중 앞에서 모세와 그리스도를 연관 지어 죽음과 부활을 제시할 필요를 느낀다. 실상 ‘우두머리와 구원자’라는 칭호는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적용하기 전에 모세에게 적용되었다. 모세와 그리스도께서는 모두 자기 백성의 우두머리이자 해방자이시다(참조. 탈출 2,14).

역사는 되풀이된다. 되풀이되는 역사를 돌아보면 뭇 사람을 해방하는 사람은 거의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가 그러하셨고,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한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두 증인은 사도들과 성령이시다. 심문과정에서 베드로는 죽임을 당한 예수께서 부활하여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의 주님과 구세주가 되셨음을 증거한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그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신다. 성령께서 증인이 되어 모든 이의 마음 안에서, 그리고 모든 사건 안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사람들의 부당한 요구와 법률에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함”을 목숨 걸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회와 세계 속에서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내걸고 만물의 주인,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의 주인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성령께서 자리 잡고 계시면서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신다.


화답송(시편 30[29],2와 4.5-6.11-12ㄱ과 13ㄴ[◎ 2ㄱㄴ]) 해설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셨나이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는 시편이다. 시편작가는 아마 죽을병에서 낫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건을 두고 노래하는 것 같다.

오늘 전례에서 “주님, 당신께서 제 목숨을 저승에서 건지시고 저를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습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비에 적용할 수 있다.

이제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예수님처럼 살고자 했던 올바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제2독서(묵시 5,11-14) 해설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

거룩한 자들의 회중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대목은 하느님 나라의 천상 전례에서 수많은 군중이 환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자기들의 우두머리에게 환호하는 군중을 상상해 보라. 이는 이 세상을 통치하고 싶은 야욕을 가진 자들이 자나 깨나 품고 있는 꿈이다. 그러나 야욕에 찬 그 꿈은 악마적인 꿈이다. 군중으로부터 환호와 찬양을 받을 자격은 어느 사람에게도 없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거나 다스릴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유일하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사람들 앞에서 군림하지 않고 뭇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셨다. 그래서 사람이 지은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고 용서하기 위해 당신 목숨을 치욕스런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바치셨다.

오직 하느님만이 온 인류를 다스리고 모든 백성으로부터 찬양을 받으실 자격을 가지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임금으로써 온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치욕스럽게 죽어 가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 절대 권력을 넘겨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제 모든 사람의 유일한 주님이 되고 임금님으로 군림하신다. 이제 주님이 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처럼 수고를 아끼지 않고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고 지키고 키우는 모든 사람을 틀림없이 당신 왕권과 부활과 영광에 동참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야욕적인 꿈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들을 끝까지 지탱해 주는 희망이다.


복음(요한 21,1-19 또는 요한 21,1-14) 해설

<티베리아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밥상을 차려 주시고,

베드로에게 당신 양떼를 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사람들을 섬기다가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에 바침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받아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1-1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부활한 후 당신 사도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을 상징하는 호숫가에 서 계시고 제자들은 아직 시련과 위험과 풍파가 심한 물 위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 사도들은 당장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직 세상살이를 해야 하는 사도들로서는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그분을 알아볼 수 있다.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 제자들을 초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처럼 자신을 바쳐서 모든 사람을 섬김으로써 모든 사람이 둘러앉을 친교의 밥상을 차리라고 당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믿음의 출발점이다(15-1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도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아 파견하신다. 자기 자신을 바쳐 섬김으로써 모든 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사로잡으라고 파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당신 성령의 능력으로 당신 양떼인 모든 사람을 앞장서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만이 유일한 목자이고 영도자이시다. 당신 제자들,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도 다만 당신의 충실한 도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과 처지에 동참하고 종의 신분이 되어 예수님처럼 가장 치욕스런 수난과 죽음까지라도 달게 받아야 할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을 따름이다. 예수께서 당신 일생을 통해 그러셨던 것처럼 그 제자들도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권력과 칭송과 환호와 영광을 결코 차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민족과 인류를 대할 때 특권의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처럼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의식을 가지고 서로 위해 주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온갖 오해와 멸시와 박해를 참아 받고 생명까지 바쳐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을 따름이다. 상급과 영광은 아직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지만 어느 날엔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일진대 다른 사람들보다도,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어린 양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닮아 있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만이 그들 어깨 위에 무겁게 지워져 있을 따름이다. 사명을 받고 파견된 신자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와 모든 사건 속에 활동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받들어 모시고 몸 바쳐 심부름할 책임과 사명만을 지고 있을 따름이다. 나아가 모든 사람이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자신 안에서 정의와 사랑을 애타게 부르짖는 성령의 탄식을 듣고 따라야 할 사명을 지고 있다 하겠다.


묵상

<주일 전례는 파스카(건너감)를 기념한다>


주일 전례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 전례가 파스카를 기념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일 전례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과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파스카(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 증오와 불의와 분열에서 사랑과 정의와 일치로 건너감)의 신비 속에 잠김으로써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사람 곧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속에 갇혀서 자기만을 위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처럼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면 지칠 줄 모르는 힘을 얻게 된다.

파스카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건너감이 아니라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건너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 되고 십자가의 뜻을 헛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순례길과 종점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승리를 목표로 투쟁하듯 살아야 한다. 나날이 견디는 단조롭고 수고스런 노동과 수난 때문에 쉽게 포기하거나 지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고통과 죽음은 이 세상에 살 동안 사람이 겪어야 할 몫인 것이다. 수모, 수난의 십자가를 마지못해 지고 가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와 부활과 영광에 희망을 걸고 기쁜 마음으로 흔연히 지고 갈 때 비로소 사람의 삶은 새로운 삶으로 바뀐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라고 초대받은 모든 사람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구체적인 삶으로써 생생하게 증거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상 모든 사람은 더 이상 노예근성으로 두려움에 싸여 살 필요가 없다. 인격을 무시하는 인습과 사회통념은 악마의 세력인 만큼 그 세력에 굴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죄악과 악마의 세력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두신 까닭이다. 이제 모든 사람은 집요하게 위력을 떨치는 악마의 세력을 깨부수고 모든 사람의 인권을 세우며 우애와 친밀한 사귐을 터득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려운 난관과 고난, 박해, 죽음까지도 이겨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겠기 때문이다.


<주일 전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전례이다>


주일 전례는 구약성경과 시편을 봉독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살다 간 모든 사람도 ‘어제와 오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에 관한 신약성경의 기록과 특히 복음서를 낭독함으로써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낡은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바뀌라고 초대한다. 주일 전례는 회중과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만을 위한 전례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신자들을 파견하는 전례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모든 이들을 위한 봉사와 희생이 어우러져, 그리스도의 제사와 함께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가 전례다. 그러므로 전례는 세례 받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와 모든 문화 속에서 진정으로 사람끼리 서로 위해 주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가는 가정과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밑바탕이 된다.

그리스도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사랑이신 성령께서 살아 계신다. 그 모든 사람이 성령의 끈으로 이어지고 묶여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고 있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주일 전례로 비단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물로 세례 받지 않았어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증오와 불의로부터 사랑과 정의로 끊임없이 나아가면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건너야 하는 필생의 파스카(건너가는 전례)를 지내고 있다. 


복음해설(2)


후일담: 예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21장)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요한 복음서 일차 편집은 20,31로 끝났다. 그렇지만 요한 복음서 저자 또는 그의 한 제자 또는 여러 제자가, 요한 복음서 결정판을 내기 전에, 부활한 분이 나타나시는 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저자는 신약성경의 큰 두 인물인 베드로와 사랑받던 제자 사이의 관계에다 관심을 집중시킨다.

예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나타나신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21,1) 무대는 요한 복음서에서 잘 알려진 곳이다(참조. 6장). 여기에서 언급하는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21,2) 여기에서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키기 위하여 ‘제베대오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했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저자들(예로서, F.M. 브라운)은 사랑받던 제자가 자기 작품 안에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고 그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었다면, 예수께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 속에 제베대오의 아들들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사랑받던 제자가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열거하는 두 제자 가운데다 사랑받던 제자를 포함시킨다.  

베드로가 먼저 나선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21,3) 요한 복음서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2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고기를 많이 잡았느냐고 묻고, 그들이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고 대답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21,6ㄴ) 루카 복음서 저자도 이 기적적인 사실을 이야기한다(5,4-10). 어떤 저자들은 요한 복음서 저자가 이 기적 이야기를 부활한 분이 나타나신 사실과 자리바꿈을 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봐스마르드 같은 또 다른 저자들은 이 기적이 징표들 자료의 일부를 이루는 것 가운데 세 번째 것이라고 믿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기적이 일어난 것을 깨닫고서 예수님을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사랑받던 제자다. 한편, 맨 처음 반응을 보인 사람은 베드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21,7) 이 구절에서 두 차례 되풀이되고 이 이야기 끝에 다시 나오는(21,12) ‘주님이십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뜻이 깊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스승님’ 대신 ‘주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 칭호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당신의 신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 갖추셔야 할 조건을 보여줌을 뜻한다.

다른 제자들이 배를 호숫가로 끌고 간다(21,8). 그들이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나와 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21,9) 부활한 분이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음식, 정확히 말해서, 빵과 물고기를 준비하시는 매혹적인 장면이다. 그 음식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에서처럼 성찬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승은 그 기적을 그렇게 보았다. 이어서 예수께서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21,10)라고 명하신다. 시몬 제드로가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린다. 그물이 큰 물고기로 그득 차 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물고기 숫자를 백쉰세 마리라라고 정확히 헤아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21,11) 백쉰세 마리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충만함을 뜻한다고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가진 낱말의 숫자와 같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다른 저자들은 하나인 교회를 암시한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와서 먹어라.’고 제자들을 초대하신다(21,12ㄱ). 그리고 요한 복음서 저자는 다시금 이렇게 덧붙인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1,12ㄴ) 예수님의 동작은 성찬례와 관련된 장엄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21,13)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지적으로 끝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21,14) ‘세 번째’라는 숫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에 관한 언급으로서, 주요한 두 차례 발현, 즉 파스카 밤에(토마스가 없을 때) 나타나신 일과 그 다음 주간에(토마스가 있을 때) 나타나신 일 다음의 발현을 가리킨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일은 이 숫자에 들어가지 않는다. 표징들의 자료와 갖는 상응성은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당신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신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21,15) 예수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대화는 의심할 여지없이 베드로가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예수추종자들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가리켜 보이고 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은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만이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 관계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임무에서 드러난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그 대화는 약간 변형되어 두 번(21,16), 세 번(21,17) 되풀이된다. 가장 의미 깊은 말은 베드로의 세 번째 답변에 나온 말이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7) ‘양들’ 또는 ‘어린 양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별다른 의도가 없이 약간 변화를 주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전체로 볼 때 1,42(“너는 앞으로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에 나오고 마태 16,16-19에서 폭넓게 나오는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를 사목하라는 임무를 맡기신다. 그 임무는 스승님을 믿고 따르며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사목하는 임무는 죽기까지 목숨을 내놓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요구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21,18) ‘두 팔을 벌리면…’이라고 하면서 베드로가 스승처럼 죽임을 당하리라는 예고는 베드로의 순교를 요한 복음서의 이 부분에서 예고했음을 가리킬 수 있다. 아무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이 순교하여 죽을 것임을 예고하신 것은 신적인 당신 지혜만이 아니라 또한 당신 추종자들에게 흔히 들이닥칠 미래에 대한 예고와도 들어맞는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베드로의 죽음을 암시했음을 분명히 한다. 베드로의 죽음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21,19ㄱ).

이 설명 다음에 요한 복음서 저자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21,19ㄴ) 요한 복음서 마지막에 가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초대는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베드로는 1,42에서 부르심을 받으면서부터 줄곧 예수님을 따랐다. 베드로는 또 예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68-69) 그런데 당신을 따르라는 이 새삼스런 초대는 무슨 뜻일까? 문맥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 받으심’에 참여하라는 초대로 보인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이어지는 요한 복음서 마지막 장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담고 있는 이 장면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21,20) 요한 복음서 저자는 사랑받던 제자에 대하여 말하려고 최후만찬을 많이 들먹인다. 베드로가 예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21) 베드로는 사랑받던 제자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여 바로 앞 문맥(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언급)과 다음 문맥(“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21,22])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받던 제자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가정한다. 이 말씀은, 마르 9,1의 로기온(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 한, 공관복음서들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그 말씀은 사랑받던 제자의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뜻할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해석하지 않으면 그 구절을 알아들을 수 없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자기 습관대로 우리에게 설명을 덧붙여준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21,23) 이 설명은 이 부록을 쓸 시점에는 사랑받던 제자가 이미 죽고 없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사랑받던 제자가 요한 복음서의 저자로 제시되어 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21,24) 이 말씀으로 넷째 복음서는 사랑받던 제자의 작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는 우선 자기 증언을 보장한다. “이 제자가 이 일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기록하다.’라는 동사는 직접 글을 썼다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요한의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전승을 보증할 수 있다는 넓은 의미의 저작권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몇몇 조각은 사랑받던 제자 자신의 입술을 통하여 처음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 시대와는 거리가 한참 먼 그와 같은 저작이나 저자 형태를 우리는 ‘문학적인 저자’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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