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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종말은 일어났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작성자박순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0-07-23 조회수2,667 추천수8 반대(0) 신고

                                                                1999, 11, 30, 화, 대구평화방송

+ 찬미 예수님

성서독서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감히 바라며 이 글을 띄웁니다.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성서 텍스트를 외우실 정도로 꼼꼼하게 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서독서는 Jean DELORME 신부님의 강의를 기초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마태오 25, 31-46: 최후 심판

31"인자가 자기 영광에 싸여 오고 모든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어좌에 앉을 것입니다. 32그러면 그 앞에 모든 민족들이 모일 것입니다. 그는 마치 목자가 양들과 염소들을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각각 갈라 놓을 것입니다. 33양들은 자기 오른 편에, 염소들은 자기 왼편에 세울 것입니다. 34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새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마련한 나라를 상속받아라. 35사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내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36헐벗었을 때에 나를 입혔다.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보았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 왔다.’ 37그 때에 의인들은 그분에게 대답하여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당신이 굶주리신 것을 보고 대접했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했습니까? 38저희가 언제 당신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혔습니까? 39저희가 언제 당신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당신을 찾아갔습니까?’ 40그러면 임금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가 나의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 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그 때에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입니다. ’저주받은 사람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심부름꾼(그의 천사)들을 위해서 마련된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 42사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맞아 들이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나를 입히지 않았다.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돌보지 않았다.’ 44그 때에 그들도 대답하여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당신이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나그네 되거나 헐벗거나 병들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당신의 시중을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그 때에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이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삶을 누리러 갈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의 두 이야기(열 처녀와 달란트이 비유)와 같은 비유 이야기가 아니라, 인자가 오실 때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직접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것을 최후 심판에 관한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미래에 있을 최후 심판만을 생각하기 이 전에, 먼저 이 이야기 자체를 잘 읽어 봐야겠습니다.

먼저 긴 이 이야기를 요약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인자(사람의 아들)가 왕이 되어 오시는 날, 모든 민족이 인자에 의해 두 부류로 나뉘어 집니다. 나누는 분은 인자인 왕이며, 그분의 관점에 의해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그 관점의 기준이 되는 것은 가장 작은이들이며, 이 작은이들과의 관계가 됩니다. 이 작은 이들은 양의 편에도 염소편에도 있지 않고 그들을 가르는 경계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뉨의 기준이 되니까요. 두 편 모두 이 작은 이들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구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작은이들의 결핍과 고통에 동참하는 실행을 하고 안할 때는 그 대상이 사실상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아들인 왕이 와서야 그 작은이들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가 나의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 작은이들은 아들인 왕의 형제들이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의 형제이며, 예수를 대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이들에 대한 행위에 입각해서 그들의 자리가 정해집니다. 말하자면 상속자의 자리와 영원한 불,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거나 영원한 고통을 겪거나 하게됩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의 목적은 단순히 그 작은이들의 정체가 왕의 형제라는 것을 알리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 작은이 고유의 인간이 무시될 위험이 있지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얘기하자면, 어떤 신심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서는 제각기 작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들이 어떠한 일을 어떻게 했는가 하는 실천 경험담들을 발표했습니다. 모두가 "나는 어떠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작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에게 어떻게 어떻게 해주었다"라는 실천담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작은 예수님을 위해 또 작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에게 해드린다는 생각으로 행해졌습니다.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며 산다는 것, 모든이들을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산다는 것 물론 옳은 일이며 잘하는 일이고 권장할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자체의 인간은 어디 있는가?  만약 누가 나에게 ’자 당신에게 내가 이것을 해 주는 것은 당신이 작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작은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라고 하면서 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즉 나를 다른 누구와 대치시키면서 내게 어떤 도움을 줄 때,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내게 해준 것은 실제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며, 나는 다른 누구의 대체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의 존재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내가 그들에게 했을 때, 납득할 만한 대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즉 누군가에 의해서 그 누군가가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개별적인 인간 자체의 존엄성이 가리워 진다면 그것은 인간 개개인을 다양한 차원에서 해방하러 오신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35절에서 36절 그리고 42절에서 43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사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내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에 나를 입혔다.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보았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 왔다."

도움이 필요한 결핍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통과 결핍의 상태가 6가지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 목록이 모든 결핍과 고통을 총 망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6가지는 매우 의미 있는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굶주린 사람들을 버려두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을 극단적으로는 죽음에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을 것과 주거지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을 지키며 최소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기 위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었거나 감옥에 있게 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를 자의건 타의건 박탈 당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병원과 감옥은 인간이 살아가는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지요? 인간적 삶을 위해서는 비 정상적 공간입니다.

여기서 또한 주목할만한 것은 감옥에 있는 자들이 비단 옳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감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유야 어찌했던 감옥에 있게된 모든 이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나쁜 일로 감옥에 있게된 사람들도 다 포함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음식과 마실 것, 주거와 의복 그리고 건강과 자유인데 이것들은 도움과 환대, 방문과 인간적인 가까움을 호소하는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이 6가지 요소는 인간의 생명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관계되는 것들로서, 인간이 육체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간답게, 인간의 존엄성 안에서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기에 필수적인 것과 관계됩니다. 이 작은이들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위협받는 것은 바로 인간 자체인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그 존엄성이 존중되어야할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주거와 자유로부터 위협받는 이들을 그 상태에 버려두는 것은, 단순히 내가 나누지 않는 잘못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인간의 상태 밖에 버려두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 즉 그들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을 인간 삶의 바깥에 두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즉 인간인 이 가장 작은이들을 삶의 바깥에 방치함으로써, 내가 결국 있게되는 곳은 영원한 불 곧 정상적 인간이 살 수 없는 공간입니다. 이 사실은 비단 최후 심판에서 뿐 만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그러한 처지에 나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하듯이 그들 하나도 무시되거나 소외시켜서는 안되는 존중되어야 할 인간인 것입니다. 그들도 나와 똑 같은 인간인데 그들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곧 그들의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 내가 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이 작은이들의 정체성 곧 예수의 형제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인간 그 자체로서의 정체성이 얘기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바로 이 가장 작은이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가장 작은이로서만 우리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가장 작은이들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관계를 맺어야할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한 이 정밀 독서는 이 이야기를 단순히 내가 도와준 작은 이들이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문제보다 더 깊은 것 즉 사람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새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마련한 나라를 상속받아라"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이 가장 작은이들을 도와준 사람들을 위해 창조 때부터 마련된 자리가 있으니 그것이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의 자리입니다. 그것은 아들(자식)의 자리이며, 선물입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도달해야하는 위상 즉 되어야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것은 또한 창조 때의 우리 본래의 자리이며 본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의 말씀은 왕이되어 오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작은이들과의 관계를 제자들에게 또 지금의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욱 더 우리가 되어야 할 한 인간에로의 초대, 새로운 출생에로의 초대입니다. 창조 때에 우리에게 선물로서 부여되어 있는 위상의 한 주체 즉 아버지의 상속자, 곧 한분이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 그것은 곧 이 사실과 그것을 위한 실천을 알리는 말씀과 관련된 새로운 출생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소외되고 인간이 위협받고 있는 작은이들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우면서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각자가 가장 작은 이들에게 행하는 것이, 우리를 되어야하는 인긴적 위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며, 참 인간으로서, 말씀 안에서의 참 아들로서 태어나게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아들이 누리는 상속권을 거부하는 것이며, 아들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다시 태어나야할 나의 생명이 위협 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아기로 태어나는 생식적 출생이 있고 또 이 아기는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의 어른으로 태어남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장하기를 거부한 아기인 것입니다. <<양철북>>이라는 독일 영화를 기억해보면 될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이 성장을 거부한 아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진정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에 의해서 되어야하는 나의 존재가 위협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인간 밖에 두는 것, 스스로를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과 통하는 얘기일 것입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 즉 아기의 상태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주체적인 결핍 상태, 인간 존재로서의 결핍 상태, 그것은 누구에게 받는 형벌이라기 보다 내 스스로 초래한 고통의 상태일 것입니다.

이 종말 이야기 안에서 얘기되는 작은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질과, 자녀로서의 새로운 출생과 한 분이신 우리의 아버지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종말론적 심판의 기다림은, ’우리가 무엇인가? 즉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진실과 관련된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갈망과, 우리를 인정해줄 타자의 말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종말은 일어났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기도 : 이지희 (헬레나)

누군가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해 주었을 때

내가 행한 선행이나 나눔이

얼마나 값진 것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하여

베풀었던 어떠한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온전한 모습을 만들었고

서로의 갈비뼈로 창조된

그 태초의 주고 받음을

비로소 행했다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의 나라에

형제자매로서

하나의 인간 그 본연의 모습대로

속해진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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