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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모님, 그리고 오월 광주(성모의 밤)
작성자상지종 쪽지 캡슐 작성일2000-05-28 조회수2,694 추천수7 반대(0) 신고

어제(5월 27일) 밤에 성모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날 했던 강론을 올립니다.

 

 

성모님의 고통, 그리고 오월 광주의 고통

 

루가 1,26-45 (예수 탄생의 예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이틀째 부슬부슬 내리고 있습니다. 오월의 마지막을 성모님께 봉헌하려는 우리의 맑고 밝은 마음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날씨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날씨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성모님의 고통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이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모님의 영광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뱀의 머리를 밟고 계시는 승리의 어머니, 화려한 화관에 빛나는 성모님의 모습만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인이라면 모두 성모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영광을 한껏 받고 계시는 성모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희망 말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 주어진 하느님의 영광과 빛나는 칭호가 있기까지 남모르게 흘렸을 성모님의 눈물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성모님이 평생을 간직하셔야 했던 아픔을 잊고자 하는지도 모릅니다. 슬픔보다는 기쁨을, 아픔보다는 즐거움을, 죽음보다는 삶을 원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감수하셔야 했던 성모님의 아픔, 주님께서 베푸실 구원에 대한 희망 때문에 받아 안으셔야 했던 성모님의 아픔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씀을 듣습니다.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성모님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곧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의미하였기에, 분명 성모님께서 내리셔야 할 결단은 생명을 건, 죽음을 각오하는 결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여느 열심한 신앙인들의 신앙 고백과 다르지 않는, 그래서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되는 성모님의 응답 안에는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막을 수 없는 성모님의 굳은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응답이 있었기에 성모님은 평생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실 수밖에 없었지만, 이 아픔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이 응답으로써 성모님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당신 태중에 모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를 당신의 품안에 품으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출산의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처럼, 구세주 예수님과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성모님의 고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아픔은 아픔 자체를 위한 아픔이 아닙니다. 만약 그 자체를 위한 아픔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고, 우리에게 결코 희망을 안겨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아픔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아픔이고, 앞으로 주어질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날을 준비하는 아픔이며, 죄로 인해 겪게 된 인간의 모든 아픔을 없애는 아픔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오히려 기쁨과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참 기쁨과 희망을 나누며 성모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모아 성모님께 봉헌하는 오늘, 5월 27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 안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아픔과 통곡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넘길 수 없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20년전 오늘 새벽 광주는 열흘 동안 이어졌던 민주와 자유의 함성을 접고, 더불어 함께 사는 해방의 삶을 뒤로 한 채, 피로써 물들여졌습니다. 시민군이 지키고 있던 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던 것입니다. 처절한 죽음의 고통만이 광주를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광주는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고통을 통해 광주는 자유와 민주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품에 안는 고향으로, 그리고 어머니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20년전 광중의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목숨을 바쳐 해방과 정의를 일구고자 하는 민중의 자식들이 끊임없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어머니, 우리를 위해 몸소 고통을 지고 가신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우리 신앙인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떠올리며, 참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어머니 광주를 떠올립니다. 피에 젖은 하얀 소복을 입고 민족과 민중을 품에 안은 이 시대의 어머니 광주를 떠올리며, 정의와 자유, 해방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광주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광주를 생각하면서 성모님의 고통이 바로 이 민족의 고통과 하나가 되었음을 봅니다.

 

성모님과 함께 하는 이 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듯이, 성모님의 고뇌에 찬 결단이 없이 성모님의 영광은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현실 안에서 살아가면서 신앙인으로서 아픔을 감수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성모님을 본받아 기꺼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며, 부족한 우리를 위해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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