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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속내의 쉰 벌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5-11 조회수2,437 추천수12 반대(0) 신고

 

속내의 쉰 벌?

 5월 들어서 내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도 완연한 봄날씨를 보이고 있다. 수도권 지역보다 정확히 한 달 이상 늦게 피었던 개나리 진달래 목련도 이제 다 떨어지고 연두색으로 채색된 산들이 정겹게만 보인다. 성당 앞 마당에만 나서도 금방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앞산 뒷산의 경치가 일 년중 5월에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성모님의 아름다운 삶을 본받자고 하는 성모성월이며 가정의 달이기 때문일 거다.

 

 어제 있었던 일이다. 옆집에 사는 할머니와 성당 앞마당 한 쪽에 마련된 휴게소에서 돼지고기 삽겹살을 구워 곰취나물에 싸서 먹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어서인지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 이 할머니는 작년 봄부터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슬하에 2남 1녀들 두신 할머니는 큰 아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고,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 가자고 해도 굳이 성당에 가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시고 지금까지 열심히 다니셔서 지난 부활절에 세례를 받으셨다. 나는 할머니들이 성당에 다니신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 세례를 드리는데 일 년만에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있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지 20일이 채 안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갑자기 쓰러지셨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간호를 6개월 이상 하시다가 지난 가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을 때 찾아가 문병을 하고 나니 할머니는 평생동안 바람을 피우며 자신을 괴롭혔던 할아버지가 야속하셨던지 ’이제 저 영감이 내 말을 듣게 되었다’고 좋아하시며 앞으로 ’내 말을 안들으면 밥도 주지 않겠다’고 하시며 오히려 기뻐(?)하셨다. 이 말 한 마디에서 그동안 남편이 얼마나 못되게 살았는지와 고통스럽게 사셨을 할머니의 삶이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6개월간 할아버지는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병환을 보살폈다. 워낙 깊은 병이라 정상적으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해 겨울 초입에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다. 병원에 갇혀서 먹을 것도 시원치 않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고통을 받아서인지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할머니는 집에 오시게 되자 다시 성당에도 다니며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요즘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똥오줌을 늘 싸시기 때문에 수면부족에 시달리시며 힘들어하셨다. 그리고 혼자 식사를 하시려니 밥맛이 없다고 하시며 나와 함께 삽겹살을 구워먹었으면 맛있게 먹을 것이라고 하셔서 성당 마당에서 점심을 먹게 된 것이다.

 

 할머니도 나도 오랜만에 맛있게 점심을 먹고 기회만 있으면 자주 함께 먹기로 약속했다.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열 효자보다 악처 하나가 더 낫다’는 옛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은 것 같다. 할머니의 자식들도 사회적으로 보면 대학도 나왔고 살만큼 산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쓰러지게 되자 간호의 몫은 할머니 차지였다. 직장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 찾아오는 자식들이 있지만 그들은 제 3자에 불과하다. 할머니는 그런 자식들에게 원망하는 마음도 없으신 것 같지만 자주 ’자식들이 많아도 다 소용없다’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똥 오줌을 치면서 잠시도 꼼짝할 수 없는 힘든 병수발이지만 예전에 비해서 큰 걱정없이 살 수 있게되었다고 오히려 감사하며 사시는 할머니에게 자식들은 그저 마음에 든든하게 느껴지는 분신인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병간호를 해야하는 것이 힘에 부치다고 하시며 어서 빨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고 솔직히 고백하신다.

 

 할머니의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의 달을 살아가며 나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이런 아픈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에 갓 입학해서니까 30세에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그러나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주 가보는 것은 물론 간호도 한 번 못해드렸다. 내가 6세 때 친어머니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돌아가시자 3남 1녀인 우리 손주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인데 말이다. 우리는 할머니의 젖꼭지를 만지며 자랐다. 생후 7개월이었던 남동생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랄 정도였다. 그 동생은 지금 장가를 가서 2남 1녀를 낳고 잘 살고 있다. 그런 할머니가 쓰러지셨는데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하다가 신학교 2학년 때 부음소식을 듣고 장례미사에만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

 

 조부모님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고 자란 나는 공부한다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그분들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한 번도 지켜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더욱 슬픈 일은 앞으로도 고향에 형님 내외와 함께 농사를 지으시며 사시는 아버지가 병환이 나시거나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나는 ’불효자는 우옵니다’는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가정이 해체되어가는 현 세대에 대해서 성서의 말씀과 온갖 신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강론은 열심히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봉양하지 못하는 옆집 할머니의 자식들 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고향에 계신 형님가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슬하에 자식이 효자라고 했다. 아무리 출세를 하고 용돈을 듬뿍 보내드리는 자식이라도 따스한 밥 한 공기를 퍼 드리는 자식이 제일인 것이다. 나같이 멀리 떠돌아다니다가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리 좋은 인생이 아니다.

 

 오늘도 옆집 할머니는 웬수같던 남편의 병수발에 홀로 밤을 지새우시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자신은 잠을 못자고 밥맛이 없어서 성당의 젊은 신부와 밥을 먹었으면 하는 외롭고 힘든 삶을 살고 계시면서도 타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은 잘 살기를 기도하는 할머니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의 인생 길이어야 하는가? 이번 주일 미사에는 조부모님께 못해 드렸던 효도를 성당에 다니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게 대신 해야겠다. 이번 주일에는 속내의 한 벌씩 사서 드려야겠는데, 한 쉰 벌도 모자랄 듯 싶다.

 

@@@ 부족한 제 묵상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글을 원하시면 저희 성당 홈페이지(www.artchurch.or.kr)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일고 고견을 남겨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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