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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선자들 왜 나를 떠보는거요?"
작성자박순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0-05-20 조회수2,339 추천수5 반대(0) 신고

대구 평화 방송, 99년 시월 십 구일, 화요일 오후 2시 30, 첫 방송

+ 찬미예수님, 반갑습니다. 말씀과 새롭게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참으로 말씀과 만나고 싶으시다면 자~ 천천히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마태복음 22, 15-21 (1):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

15그때 바리사이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써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울까 의논했다. 16그리고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파 사람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말하게 했다. "선생님, 저희가 알기로 선생님은 진실하시고 길을 참되이 가르치십니다. 또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으시니 사실 사람들의 신분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17그러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됩니까, 안 됩니까?" 18예수께서 그들의 못된 생각을 알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 왜 나를 떠보는 거요? 19주민세로 바치는 돈을 보여주시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갖다 드리자, 20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오?"하고 물으셨다. 21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시오." 22그들은 듣고 놀란 나머지 그분을 그대로 두고 물러갔다.

***

   어린 시절부터, 또는 오랫동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 중에, 평일의 복음이나, 그 주일의 복음을 접하게 되면, 아 저 복음,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을 의미하지, 이미 난 다 알고 있어, 그러면서 더 이상 그 성서 이야기에 머물러 경청해볼 생각 없이 책장을 덮은 기억들은 없는지요? 이것은 우리가 성서의 말씀, 또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들을 전달하는 정보차원의 대상이나, 우리가 그 사실이나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고 기억해야할 지식의 대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고 인간의 몸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장이라 하겠습니다. 한 번만에 도달하는 만남이 아니라 한 단계 한 단계 변화를 통해 참 만남에로 발전해 가는 그러한 만남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자세히 읽음으로써, 예수님께서 그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나 또 그분이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분과의 참 만남에로 이끌고 있는지를 보면서, 독자인 우리 역시 인간이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과의 참 만남에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마태 복음 22장 15-22을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다룰 수는 없으므로, 관찰되는 한 두 가지 특징적인 것만을 얘기하고 묵상해볼까 합니다. 우리의 독서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관련되는 요소들과 그들 간의 차이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오로지 차이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어둠이란 것이 없다면 우리가 빛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없지요. 우리는 어둠이 있음으로 해서 빛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 상대적으로 빛이 있음으로 해서 어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차이를 찾아낸 다음에는 이제 해석을 해야하는 단계가 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경험이 동원됩니다. 인생경험이나 성서적 경험 그리고 신앙 및 영성경험과 지적 경험 등이지요.

 

  먼저 인물들의 행동과 말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인이라는 인물들이 음모를 꾸미는 일로 시작이 됩니다.

<<그 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어떻게 하면 말을 트집잡아 그분에게 올가미를 씌울까 의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였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서로 이해를 달리하는 다른 두 그룹이 공동의 적이라고 할 수 있을 예수라는 한 인물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서로 야합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어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왕따시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왕따의 문제는 비단 오늘날의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2000년 전에 왕따되어 결국 십자가에 희생되어 돌아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독서의 끝에 가서 시간이 있으면 다시 다루기로 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나아가 봅시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사람들을 조종하여 말하게 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알기에 당신은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이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으시니 사실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겉모양으로 판단하는 것"과 "하느님의 길"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길은 내면적인 어떤 것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200주년 신약성서에서는 "신분을 보지 않으십니다"라고 되어 있으나, "겉모양"이라는 번역이 더 직접적인 듯하고, 또 분석에 의한 이야기의 논리상 더 적합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계속 외면적인 또는 표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카이사르의 초상과 기록은 동전의 겉모양 즉 표면적인 것에 해당하며, 하느님의 것은 보이지 않는 내적인 어떤 것에 속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과연 바리사이의 파견자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당신 앞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길을 진실되게 가르치는 분으로 인정하고 진정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자하는 진실된 질문자처럼 행세하는 그들의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보시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위선자들, 왜 나를 떠보는 거요?>>.

  이것은 그들에 대한 질책이나 그들이 만든 올가미를 되씌우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자신들의 가면 밖으로 나오게 하는 한 방법이며, 진실에로의 초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의 차원으로 그들을 불러내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예수님께서 악한 이들을 가차없이 처단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단죄하고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칼 같은 말씀은 그들을 자신들의 올가미로부터 구하시고자 하심이며 그들을 해방의 길로 초대하시고 이끄시려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황제에게 주민세를(조공을) 바쳐도(주어도) 좋습니까? 혹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 왜 나를 떠보시는 거요? 내게 주민세를 바치는 돈을 보여주시오." 그들이 그분에게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드리자 예수께서는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오?"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주시오." 그들은 듣고 탄복한 나머지 그분을 그대로 두고 물러갔다.>>

  조공으로 바치는 동전의 표면에 새겨진 초상과 글자, 그것은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화된 것으로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인들의 대리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잘 관찰해봐야 합니다. 바리사이인들의 대리인들은 <조공을 바치는>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돌려주는> 문제를

얘기하십니다. 무엇을 돌려준다는 것은, 그것이 속해있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 갚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종의 빚을 갚는 상황일 것이다.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권력과

하느님의 권력간에 행해야 할 선택에 대한 얘기에서 부채의 이야기로 넘어가십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이야기가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문제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하느님에게 돌려드려야 하는 빚의 문제에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자면, <카이사르에게서 온 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당신들의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께서 온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가 될 것입니다.

카이사르와 하느님 사이의 혼돈이 없습니다. 물론 대립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근원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닌 것을 네가 너 자신을 위해 착복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돌려주어야만 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모두가 어디서 왔는가? 이것은 또한 이야기 속에서는 그들에게, 또 현재는 우리 독자에게 각자의 책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가 책임 있는 한 인간이 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이사르에게 속해있는 것을 카이사르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초상과 기록이 새겨져있으니 카이사르의 것이라면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이 동전이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명명백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돈이란 돌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돌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돈이 카이사르에게 되돌려진다해도 그것은 거기에 묶여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돌게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돈은 결국 카이사르의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아닐 수도 있으며, 모든 이의 것일 수도 있으며 또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의 일입니다. 그들은 표면밖에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돈의 내면적 성격을 보고 계셨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의 이 대답이 위기 모면을 위한 단순한 말장난만은 아니었음을 볼 수 있지요.

 

카이사르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돌려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에게 속한 것을 하느님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은 각자의 소관이며, 각자가 자신의 인생 안에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의 초상과 기록이 새겨진 돈을 공물로 바치는 문제는 그 당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문제라면, 하느님에게 갚아야 할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겠지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보다 각자 자기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은 각자가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실행해야할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빚을 바로 하느님께 돌리라 하지 않으십니다. 이웃을 통해서 하라 하셨지요.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마시오>> 로마서 13장 8절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에게 빚진 것을 과연 다 돌려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돌려드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우리가 받은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횡령 착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의 끝에 <<그들은 듣고 탄복한 나머지 그분을 그대로 두고 물러갔다>>라고 텍스트의 나레이터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예수님께로 전향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탄복했다>는 것은 그들의 가슴 어딘가에 변화되도록 신호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응하고 안 하는 것은 이제 그들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자 이제 이 이야기를 이렇게 읽고난 우리는, 그들보다 더 예수님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탄복으로 그쳐야할까요? 우리에겐 거기에 응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또 다른 묵상 하나 ♥♥

 여기서 이 사랑의 실천, 즉 하느님에게 빚 갚기를 위한 실천사항으로 이 독서의 처음에 우리가 잠깐 언급했던 예수님께서 왕따당하시는 모범을 보이신 일과 관련하여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이 가르치셨기> 때문에 왕따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되고 바른말 곧 정의와 진리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왕따되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리사이 자신들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거나 혹은 자신들의 자리가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흐름을 잘 아는 분들이라면 그들의 이러한 시도들의 끝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잘 알 것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누구도 구애받지 않으시고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왕따의 길을 굽히지 않고 가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 왕따의 문제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학교나 작은 공동체 또는 큰 공동체에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가정 안에서도. 우리가 유행 및 시속을 따르는 것도 결국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왕따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잘못된 사회의 풍습들 곧 뇌물풍조나 혼인과 관계되는 모든 허례허식 그리고 과소비 등등 헤일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된 사회 풍습인줄 알면서, 그리고 또 그 결과를 우리가 I.M.F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겪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답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왕따가 되기가 두려운 것이 아닐까요? 진리를 위한 왕따! 그러한 왕따가 될 용기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아닐까요? 한 번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눈에 거슬리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를 밀어내고, 윗자리에 서기 위해서 남을 왕따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위한 의로운 왕따의 모범을 보이신 그분을 따라 나도 참을 위한 왕따가 되어야할 용기를 기꺼이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작은 일에서부터 이 참된 왕따가 되는 훈련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하다는 반성을 해봅니다.

 이 의로운 왕따가 될 번한 용기 있는 한 할머님의 얘기를 하면서 오늘 독서를 마칠까 합니다. 이 분은 평소에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정직하고 바른 길을 가는데 동참할 것을 충고하고 호소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그렇게 현재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사랑하는 가족 중 한 분의 자녀가 수술을 해야하는 병에 걸렸는데, 누군가가 성금으로 10만원이 든 돈 봉투를 두고 간 것을 보고, 이 할머니의 질책이 대단했더랍니다. 그 아이 아버지의 직책이 다소간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계셨나 봅디다. 뇌물이라 생각하신 이 할머니는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되돌려 주라’고 바른 말씀을 하셨지요. 그래서 이 할머니는 가족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뻔 했답니다.

  이러한 왕따는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직과 바른 길을 위한 의로운 왕따가 되는 용기는 바로 내 가정 안에서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해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께로 되돌려드리는 것, 곧 사랑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엇인가 속삭여 오는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지요? 들린다면 그것은 말씀이 형제님에게 또는 자매님에게만 보내는 개별적인 득별한 신호입니다.  거기에 응답하세요. 그것은 묵상이며, 기도일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달리 말하자면 곧 말씀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이 독서를 읽고난 후의 개인적 묵상이나 이러한 성서 독서 방법에 대해 대화를 원하시면 제게 메일을 보내주세요.

 

            E-Mail: sjapark@catholic.or.kr 혹은

                       sjapark@cuth.catae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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